“부산서 국제영화제 열자” 후배들 제안에 덥석 중책 맡아
김동호 위원장이 술을 끊은 2006년 1월 1일 이후 한국 영화가 침체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게 아니라 소주 도수가 25도에서 16도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우연
그런데 말이다. 김 위원장은 다 우연(偶然)이라고 말한다. “자기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1961년 제대하고 취직이 급했던 그의 눈에 처음 띈 것이 공보부(이후의 문화공보부·문공부) 요원 모집이었다. 우연이었다. 27년의 문공부 생활을 마치고 옮긴 자리가 영진공 사장이었다. 당시 문공부 산하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사장이 공석인 곳이었다. “영진공에 간 게 영화계 인사로 변신하는 단초가 됐지요.” 돌이켜 생각하면 역시 우연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우연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식이 아니다. 경기중고교와 서울대 법대(행정학과)를 나온 그는 35세에 국장이 됐다. 고속승진이었다. ‘역시 인맥이 좋아서…’라는 말이 나왔을 법도 한데 그는 떳떳하다. “굉장히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죠. 문공부 사람들도 내 노력의 대가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요.”
문공부의 3인자였던 기획관리실장을 그는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만 8년간 했다. 최장수다. 그 기간 장관 4명과 차관 5명을 모셨다. 그라고 왜 차관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 차관으로 현역 정치인들이 속속 내려오자 그는 조용히 뜻을 접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빨리 차관이 됐으면 빨리 옷 벗고 나왔을 거고,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거고.” 1992년 그가 영진공과 예술의 전당 사장을 거쳐 다시 문화부 차관이 됐을 때 한 신문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썼다.
○ 순리
체념일까 달관일까. 그는 달관 쪽에 가깝다고 했다. 공직에 있으면서 한 번도 승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때가 되면 올라가는 거고. 그런 거죠.” 따라서 이른바 승진 운동이라는 걸 해본 적도 없다. 종교도 없고, 사주도 보지 않는다. 그럼 자신밖에 믿을 게 없다. “어차피 바닥에서부터 시작했으니까요.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광산업은 그가 어렸을 때 접었다.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란을 가서는 어머니와 함께 좌판을 벌였다. 고등학교 때는 야간 고등공민학교 강사와 가정교사를 하며 수업료를 마련했다. 대학 때는 전공서적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책을 안 읽어도 이해만 잘하면 되는 ‘법철학’ ‘행정학’ 같은 과목이 많은 4학년 때가 좋았다. 모두 A를 받았다. 어렵게 살고, 어려운 사람들 처지를 잘 알면서 관(官)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를 실감했다. 이런 ‘밑바닥 정신’은 그가 겸손의 삶을 사는 바탕이 됐다.
영진공 사장으로 취임한 뒤 두서너 달 동안 그는 사비를 들여가며 영화인들을 점심, 저녁으로 만나 영화계 현안을 파악했다. 필요한 것이 종합촬영소라는 걸 알게 되자 그는 문공부 담당 부서의 주사(主事)부터 찾았다. 그리고 계장 과장 국장 순으로 단계를 밟아갔다. 종합촬영소용 터를 찾기 위해 해당 지역 군청을 찾을 때도 항상 말단 직원부터 만났다. 1992년 문화부 차관일 때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개원이 급선무였다. 그는 차관이었지만 동료 차관이나 장관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역시 해당 부서의 계장부터 만났다. 너무 고지식한 것 아닌가. “아니죠. 그게 정도(正道)라고 생각해요. 상대방도 좋아하지요.”
공직생활과 준(準)공직생활 동안 그의 신조는 선물을 받지 않기였다. 술을 사들고 그의 집을 찾은 사람에게는 돌아갈 때 그 술을 다시 안겨줬다. 당연히 청탁도 받지 않았다. 친척 중에 취직자리를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들어준 적이 없다. 여러 유혹도 있었지만 물리쳤다. 부인이 약국을 하며 가계를 챙겼다. “그 덕에 공직생활 할 수 있었어요.” 물론 인맥 덕도 봤다. 문공부 기획관리실장을 할 때 예산을 따오고, 영화제 비용을 대는 스폰서를 구할 때 큰 힘이 됐다. 다만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인맥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는 우연은 순리(順理)로 바꿔 놓아도 될 듯하다.
○ 의리
김 위원장은 1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갔다 왔다. PIFF를 통해 알게 됐고 이후 15년 넘게 친구로 지내는 네덜란드 영화평론가 페터르 판 뷔런 씨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생일잔치를 한다고 e메일이 왔어요. 친한 친구인데 내가 여유가 있으니 나라도 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저렴한 KLM항공을 타고 오후 6시 반에 도착해 파티에 참석하고, 다음 날에는 뷔런 씨와 그 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비용은 자신이 댔다. 의리남이라고 말하니 “기분이 좋지요” 한다. 살아오면서 크게 얼굴 붉히고 헤어진 사람도 별로 없고, 오해가 있었던 사람에게는 1년이고, 2년이고 공을 들여 오해를 풀었다.
속이 상하고 자존심 상한 적이 없을 리 없다. 공직에 발을 들인 뒤에는 술과 테니스로 해소했다. 술은 한 번 마시면 50잔이고, 100잔이고 마셨다. 그동안 마신 술이 얼마나 될까. “길이 50m 수영장을 채우고도 남지요.” 그렇게 마시고도 오전 5시면 일어나 테니스를 쳤다. 새벽과 주말에는 그의 손에서 라켓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정 힘들 때는 경기 홍릉이나 동구릉에 가서 능(陵) 위에 앉아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아예 시외버스를 타고 용문산까지 가서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오기도 했단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