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핵심은 몸을 쓰는 것…창발성도 그때 가능
여기에 비추어보면, 우리 시대의 교육은 명실상부한 ‘숟가락 교육법’이다. “나 고3이야! 이런 거 할 시간이 어딨어?” 그러면 상황 끝! 어디 고3만 그런가. 초중고교생 모두 그렇다. 왜냐면 모두가 고3 예비후보니까. 한마디로 입시생은 가족 안에서 제왕이자 특권층이다. 의식주의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청소와 요리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말곤 손가락을 쓸 일도 없다. 진짜로 숟가락에 밥을 담아 직접 떠먹여주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이동은 당연히 자가용으로 한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발이 땅에 닫기도 전에 어디론가 옮겨지는 ‘공중부양’족이 대부분이다. 청춘은 봄이고 나무라 했다. 나무가 땅의 지기를 받지 못하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뿌리가 약하면 열매를 맺기는커녕 꽃샘추위도 견디기 어렵다.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학교는 배움터라기보다 서비스 기관처럼 보인다. 입시 공부 말고는 다 면제다. 청소도, 체육도, 서클 활동도 점차 줄어든다고 한다. 지난해 큰 이슈가 됐던 급식 문제만 해도 그렇다. 무상이냐 아니냐 이전에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밥을 먹는가이다. 학생들은 그냥 주는 대로 먹기만 하면 되는가? 왜 학생들은 생활과 윤리의 주체가 되면 안 되는가?(참고로 필자가 소속된 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선 주방의 윤리가 가장 ‘지엄’하다. 밥도 직접 해야 하지만 절대 남겨서도 안 된다) 동선으로만 보면 입시생은 예전의 귀족보다 호사스럽다. 육체노동 면제는 물론이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각종 제도적 서비스들을 받는다.
미국 정보기술(IT)업계 엘리트들은 자녀를 인터넷이 전혀 안 통하는 학교로 보낸다고 한다. 그곳에선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한단다. 청소와 밭일은 물론이고 뜨개질에 요리까지. 교육의 핵심은 ‘몸의 능동성’에 있다는 걸 비로소 눈치 챈 것이리라. 봄이 만물을 키우는 원리도 이와 같다. 새싹들은 그야말로 ‘자기주도적으로’ 생존한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다. 공부 또한 그러하다.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밥상을 차릴 수 있어야 한다. 공부가 ‘궁푸’(工夫의 중국어 발음. 지식을 몸으로 터득하는 것)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