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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박중현]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입력 | 2012-02-22 03:00:00


박중현 경제부 차장

“대통령은 신년담화를 통해 ‘노인들을 불사(不死)의 로봇으로 만들 순 없다. 생명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존중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담화가 나온 뒤 70세 이상 노인에 대해 약값과 치료비 지급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00세 이상 노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료 의료 서비스를 일절 받을 수 없게 됐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소설 ‘황혼의 반란’은 노인 인구가 늘면서 사회보장제도 적자폭이 커지자 청·장년층이 노인을 박해하는 미래의 고령사회를 그렸다. 소설 속 정부는 의료비 절감에 그치지 않고 급기야 노인들을 격리수용해 독극물 주사를 놓는다. 일부 노인이 탈출해 산속에 요새를 만들고 저항해 보지만 사태는 간단히 정리된다. 정부가 헬리콥터를 띄워 독감바이러스를 살포한 것이다.

8년 전 읽을 때만 해도 이 소설이 뭘 말하려는 건지 잘 몰랐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의 핵심 화두로 떠오른 복지 논쟁과 정치권이 쏟아낸 퍼주기 공약들을 보면서 복지선진국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의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올해 예산을 협의하면서 정부예산안 중 3조9000억 원을 깎고 국회가 원하는 예산 3조3000억 원을 대신 집어넣었다. 덧붙인 예산은 대학등록금 부담 완화, 영·유아 보육비 지원 등 2030세대를 겨냥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에 누락된 것은 노인에게 지급되는 기초노령연금 인상안이다.

국회의원들이 올해 양대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청년층 표를 얻으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노인층은 예산을 몰아주면서 지지를 호소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찬밥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청년 노인 영·유아 등 다양한 복지 대상 중 어디부터 지원을 늘리는 게 맞는지 정답은 없다. 다만 한정된 복지 재원의 분배를 놓고 청년과 노인의 ‘세대 간 복지갈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시작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야 정치권의 복지공약을 뜯어보면 상황은 확실해진다. 새누리당의 굵직한 공약 중 노인 관련은 ‘기초노령연금 인상 및 대상자 축소’와 ‘노인 공공일자리 취업기간 연장’ 정도다. 반면 ‘사병 월급 인상’ 등 청년층 지원 공약은 넘쳐난다. 민주당은 대학에 안 가는 고졸 청년들에게 1인당 1200만 원씩 지원하는 등 청년들에게 파격 공약을 내걸었지만 노인 공약은 역시 ‘기초노령연금 인상’ 정도에 그쳤다.

두 당이 내놓은 복지공약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돈은 기획재정부 추산으로 5년간 최대 340조 원이다. 올해 총예산(325조5000억 원)을 넘는 거액이다. 이런 큰돈을 들여 청년층 편중 복지공약을 실시하기 시작하면 고령화의 진전으로 더 많이 필요해질 노인복지 재원은 마련하기 어렵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복지 재원을 둘러싼 세대 간 긴장은 지하철 좌석을 놓고 벌어지는 노인 청년 간 갈등과 닮았다. 한정된 열차 좌석에 누가 앉느냐를 놓고 벌이는 다툼이나 제한된 복지 재원을 누가 더 가져갈까 하는 경합은 원리가 똑같다. 몇 년 새 영국과 네덜란드 등 선진국에서 벌어진 대학생 등록금 인상 반대시위도 결국 다른 복지에 돈이 너무 나가 재정이 흔들리면서 청년층을 위해 쓸 복지 재원이 고갈돼 발생한 문제다. 국민과 정치권 모두 더 멀리 보고, 더 신중히 판단하지 않으면 언젠가 노인과 청년이 ‘복지의 파이’를 더 얻기 위해 한판 ‘세대 간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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