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풀벌레야생화 어우러진 자연의 찬가
1 ‘초충도(16세기?)’. 강릉시립오죽헌박물관 소장. 이 ‘초충도’는 5만 원 지폐에 실려 있는 이미지의 원본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신사임당의 그림 가운데 진작(眞作)으로 밝혀 진 것은 한 점도 없는데, 이 작품은 비교적 진작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2 ‘들국화’(19세기). 프랑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신사임당의 작품을 떠올리게 할만큼 그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민화다. 3 ‘자수화조문보자기’(19세기). 한국자수박물관 소장. 자수를 통해 조선 여인들의 특출한 조형적 능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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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원권 지폐를 살펴보자. 앞면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초상화와 그의 대표작 초충도(草蟲圖·강릉시립오죽헌박물관 소장)가 등장한다. 한국은행은 5만 원권 지폐의 ‘모델’로 신사임당을 선정할 당시 여성에 대한 배려를 중요한 이유로 밝혔다. 또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풀벌레 그림인 초충도에는 의외로 역사적 상징성이 숨어 있다. 초충도는 사실 전통회화 관점에서 보면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들길의 야생화와 논길의 벌레를 무심코 지나치듯 풀과 벌레는 화가들의 애정 어린 눈길을 좀처럼 받기 힘든 소재였다. 많은 화가가 대체로 오이넝쿨이나 참외보다는 모란 연꽃처럼 화려한 식물을 선호했다. 또 개구리 굼벵이가 아닌 호랑이나 용처럼 위엄 있는 생명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달랐다. 사소하고 하찮고 평범한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 펼쳐 보였다.
○ 자연의 오묘한 관계가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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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은 초충도를 통해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물론이고 생물학자의 치밀한 관찰력까지 표현해냈다. 그의 그림엔 자연의 오묘한 관계와 작은 소리까지 숨어있다. 숙종 때 문인 신정하(申靖夏·1680∼1715)는 사임당의 초충도를 본 뒤 감탄해 그림을 묘사하는 시까지 썼다. “첫째 폭(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병풍에 그린 것임)엔 오이넝쿨 언덕 타고 감기는데, 밑에서는 개구리가 더위잡고 올라가네/둘째 폭엔 참외들이 온 밭에 깔려 있고, 단내 맡은 굼벵이가 흙 속에서 나오누나/셋째 폭엔 수박 위에 찬비가 흩뿌리는데, 쓰르라미 스렁스렁 깃을 떨기 시작한다.”
○ 미물 속에 자연의 평화가
신사임당은 서민의 그림인 민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민화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그의 영향력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초충도를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19세기에 그려진 ‘들국화’(프랑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소장)를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바위 곁에 활짝 핀 들꽃과 벌레가 어우러진 자연의 세계를 나타냈다. 색색의 들국화가 피어 있고 그 사이에서 들국화 잎이 춤을 추듯 너울거린다. 그림 위쪽에선 나비 한 마리와 다른 벌레 두 마리가 꽃향기를 이기지 못하고 날아든다. 개구리는 용케 벌레를 잡는 데 성공한다. 이 그림에는 도무지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오른쪽 아래에는 색띠로 채색된 바위들이 흥겨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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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색채로 재탄생하다
신사임당이 선구자 역할을 한 초충도의 세계는 자수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의 그림들은 조선시대 내내 자수로 제작됐는데 보물 제595호 ‘자수초충도병풍’과 중요민속문화재 제60호 ‘초충수병’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가 태어난 강릉은 현재 자수의 문화로 유명하다. 평범한 생활용품에 지나지 않던 강릉자수는 최근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내는 보석이 됐다. 강릉에서 자수 같은 규방문화가 발달한 배경에는 신사임당 같은 사대부 여인의 전통이 있다. 또 현대에 들어 그 아름다움에 주목한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한국자수박물관의 허동화 관장 같은 사람들이 강릉자수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자수와 보자기를 세계 여러 박물관에서 전시하며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강릉자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자수화조문보자기’(한국자수박물관 소장)다. 색동처럼 여러 색으로 표현한 이 보자기는 언뜻 보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와 나비들이 꽃으로 날아드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자연의 모습에 다채로운 색깔의 띠를 입혀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론 형태가 먼저 눈에 띄고 다음에 색채가 보이는데 이 작품에선 거꾸로 색채가 형태에 앞서 화면을 지배한다. 상식을 통쾌하게 뒤집은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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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