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파속 서울역앞 노숙인대피소, 기자가 체험해보니…
17일 밤 한파를 피해 서울역 파출소 앞 지하보도에 차려진 응급대피소를 찾은 노숙인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 잠을 청하고 있다. 고현국 기자 mck@donga.com
기자도 노숙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누웠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한 노숙인은 “신참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양말 한 켤레를 던져줬다. 옆에 있던 다른 노숙인 문모 씨(44)는 “맨발로는 밥 타러 못 가니 신발 잘 지키라”며 신발주머니를 머리맡에 깔고 자라고 조언했다. 미등이 켜진 어두침침한 방 안으로 지하도 위 단란주점에서 흘러나온 최신가요가 밤새 새어 들어왔다. 지하도를 거니는 사람들의 발소리, 웃음소리도 합판으로 만든 얇은 벽을 건너왔다. 시끌벅적한 바깥세상 소리와 자신들의 가래 섞인 기침 속에서 노숙인 60여 명은 그렇게 밤을 보냈다.
대피소 안에서는 음주 흡연 식사가 모두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대피소 내 노숙인들은 대부분 서로 대화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신문을 읽거나 일찍 잠을 청했다. 노숙인 김모 씨(44)는 “행동이 아주 자유롭진 않지만 취침 및 기상, 식사시간 등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다른 쉼터보다는 나은 편”이라며 “엄동설한에 바람을 피하고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이 있어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노숙인들이 잠든 오전 1시 반경 다시서기센터 순찰팀과 자활근로자(자활의지를 보여 월급을 받으며 센터에서 일하는 노숙인)들은 따뜻한 물이 든 페트병을 챙겼다. 순찰팀은 기온이 뚝 떨어지는 오전 1시 반과 3시 반마다 2인 1조를 짜서 서울역과 남대문 인근을 돈다. 단체생활이 불편해 대피소 대신 노상을 고집하는 노숙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다. 노숙 8년차라는 박모 씨(38)는 “대피소는 사람이 많고 냄새도 고약하다”며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통제하고 규칙이 있는 단체생활은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다른 50대 노숙인도 “(대피소에는) 술 먹고 들어와 고함을 지르거나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들 때문에 잠이 잘 안 온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날도 노숙인 85명은 눈발이 흩날리는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밖에서 잠을 청했다. 이틀 전 130여 명에 비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동사의 위험이 남아 있다. 순찰팀은 육교 아래와 공원 흙바닥 위에 종이박스와 신문지로 자체 대피소를 차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숨을 쉬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순찰팀이 두 번째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오전 4시 반경 대피소에서 밤을 보낸 노숙인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울역 앞 무료급식소 운영 시간인 오전 4∼5시에 맞춰 일어나는 것이다.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노숙인도 있었다. 이날 하루 대피소를 찾은 노숙인은 총 115명. 대피소는 오전 8시가 되자 남아 있던 노숙인을 모두 내보내고 청소를 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의 거리 노숙인은 439명으로 지난달에 비해 130명가량 줄었다. 그러나 홈리스행동 등 노숙인 관련 시민단체들은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서기지원센터는 현재 서울역과 남대문 인근의 거리 노숙인을 250명 내외로 추산했다.
고현국 기자 m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