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를 지켜라” 어릴적부터 신용 강조하신 아버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랜 세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를 믿고 지켜준 많은 분이 주위에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신용을 가르쳐 준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아버지는 개성상인이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세 살 때 부친을 여의었다. 아버지는 막내였지만 홀어머니와 누님 두 분을 부양하면서 어렵게 자랐다. 가정 형편이 하도 어려워 초등학교만 마친 뒤 정미소의 품팔이 일꾼으로 시작했다. 안 해본 것 없이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는 장사를 배웠고 피란 후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에서 40여 년간 포목점을 운영했다.
집에서는 엄한 아버지였다. 자식들은 항상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단연 ‘신용’에 관한 것이었다. “남에게 꼭 신용을 지켜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신의가 가장 중요하다. 너희들은 누구에게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돼야 한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설교를 하였다. 사춘기 때는 아버지 말씀을 하도 듣기가 싫어 가끔 아버지에게 대들었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는 아주 착한 분이었다. 홀어머니와 두 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가족을 극진하게 돌보았다. 두 분 다 홀로 지내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항상 고모들에 대한 후견인 역할을 맡아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큰고모는 치매를 앓게 됐다. 당시 아버지도 협심증으로 많은 고생을 하던 터였다.
1994년 겨울이었다. 심장수술을 앞둔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잊을 수 없다. 생전 수술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던 것 같다. 밤새 한잠도 못 잤다면서 아버지는 오전 4시에 내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석희야, 내가 죽거든 고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너희들이 정성으로 잘 모셔라.” 수술실에 들어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생애를 다하는 순간까지도 누님을 걱정하는, 책임감 강한 분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아버지에게 배운 그대로 신용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처음에 전자제품 판매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응모했을 때 “나에게 3개월을 주면 나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큰소리쳤다. 나는 ‘판매왕’이 돼 나의 약속을 믿고 일할 기회를 주었던 지역 매니저에게 약속을 지켰다. 15년 동안 몸담았던 이 직장에서 나는 고객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쏟아 일했다.
이런 나의 모습은 아버지의 ‘신용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는 오랜 생애를 통해 한 우물만 파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훌륭한 인성을 가르친 아버지의 올바른 가정교육이 있었기에 나 자신도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남을 섬기는 일에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삶과 말씀은 내 인생의 큰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강석희 미국 어바인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