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 객원논설위원·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
그는 원래 ‘주가슈빌리’라는 그루지야(현 조지아) 사람인데 강철을 뜻하는 ‘스탈린’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공포시대는 무작위적인 국가 주도의 테러가 난무했다. 테러 대상과 범위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했기에 더 무서웠다. 소비에트 체제 자체의 근본 문제와 스탈린의 개인적 잔인함이 결합돼 생겨난 세계사적 비극이었다.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주연의 ‘위선의 태양(1994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은 일상 속 내재(內在)된 스탈린 시대의 공포를 소름끼치도록 잘 묘사한 걸작이다.
소비에트 체제 비판한 85년 삶
아무리 스탈린이 사랑했어도 스베틀라나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는 이름도 자살한 엄마의 성인 ‘알릴루예바’로 개명하고 196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스탈린의 딸이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은 냉전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어 그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펴내 아버지와 소비에트 체제를 비난했다. 1984년 조국인 소련으로 돌아갔지만 정착에 실패하고 2년 만에 소련을 떠나 유랑하면서 살아갔다. 그가 며칠 전 세인들의 망각 속에 미국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돌이켜보면, 겉보기엔 멋있어도 근본적으로 치명적 결함을 가진 공산체제 중에서도 최악의 버전이 스탈린 체제였다. 이 체제에 대한 충성에서 끝까지 헤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현실을 자각하고 뛰쳐나온 이들도 있었다. 스탈린주의자였다가 공산주의 비판가가 된 ‘한낮의 어둠’의 작가 아서 쾨슬러가 후자의 대표 격이다. 더욱이 자신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스탈린 체제에 대한 존경과 환상을 가진 사르트르나 조지 버나드 쇼 같은 “쓸모 있는 얼간이들”(레닌의 표현)도 많았다.
세계적으로 많은 스탈린 체제의 변용(變容)이 나타났다. 마오쩌둥, 폴 포트, 김일성-김정일은 스탈린처럼 타고나길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통치가 못지않게 참혹했던 것을 보면 개인의 성격보다 체제의 성격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마오 체제를 보자. 대약진(大躍進)운동만 해도 무려 4500여만 명을 희생시켰다(디쾨터 ‘마오의 대기근’·2011). 그런데 이런 체제를 이상사회로 예찬한 리영희 같은 ‘얼간이’들도 많았다. 그에게 마오 체제는 상상 속에서 그려낸 허구의 세계였을 뿐이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무려 자국민의 4분의 1을 학살했다.
공산독재 바로 못 본 ‘얼간이’들
스탈린 딸의 사망으로 그의 굴곡진 인생을 돌아보면서 세계적 스탈린 체제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녀를 보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습가문의 ‘아이들’이 오버랩된다. 그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그들 중 스베틀라나와 같은 ‘이탈자’는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
강규형 객원논설위원·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 gkahng@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