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에 이룬 어릴적 꿈
이재식 씨가 야구 복장과 장비를 갖추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선수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며 안경까지 벗었다. 지적이던 눈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이 씨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제철소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사람이다. 사회인 야구 경기 횟수(월 2∼3회)에 만족하지 못해 평일 날 매일 새벽에 모이는 조기야구회에도 가입해 활동한다.
1면 소년은 투수가 되고 싶었다
1980년 경북 월성군 양남면(현 경주시 소속). 국민학교 5학년 소년은 야구가 그렇게 좋았다. 한 팀을 꾸리기에도 부족한 동네 아이들과 늘 집 마당에 다이아몬드를 그리고 야구 놀이를 했다. 그의 포지션은 언제나 투수. 이상무 화백이 그린 ‘아홉 개의 빨간 모자’ 주인공 독고탁처럼 고독한 승부사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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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 가냘픈 몸매지만 101km 강속구
그는 올해 분당리그에서 47과 3분의 1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4.73을 기록했다. ‘핸드볼 스코어’가 자주 나는 사회인 야구에선 대단한 기록. 타자 261명을 상대해 피안타 82개, 홈런은 1방만 맞았다. 현재까지의 기록은 4승 4패 1세이브.
그의 특기는 절묘한 제구력이다. 4사구가 2이닝에 1개 나올 정도. 타자를 잡을 때도 제구력을 바탕으로 맞혀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인 야구에선 선수들이 공을 치고 싶어 엄청 근질근질해 하거든요. 유인구를 던지면 대부분 배트가 돌아갑니다, 하하.”
얼마 전 선수 출신으로부터 구속을 높이려면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거나 체중을 늘리라는 충고를 받았다. 신장 172cm인 이 씨의 몸무게는 59kg밖에 되지 않는다. 체중을 늘릴 거냐고 물으니 “현재의 제구력에다 구속만 조금 빨라지면 삼진을 좀 더 많이 잡을 것 같다. 그렇지만 살이 잘 안 붙는 체질이라 고민”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 잘 던지는 이가 잘 친다
그는 처음엔 타격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투수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투수도 타격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배트를 들었는데 의외로 결과가 좋았다. “투수를 하다 보니 타격 감각이 절로 생기더군요.” 그러면서 이 씨는 10여년 전 자신의 모교 경주고에 패배를 안긴 부산고 이야기를 꺼냈다. “추신수 선수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더군요. 에이스 투수에다 4번 타자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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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 나는 야구가 정말 좋다
그를 보면 야구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그렇게 오래 참았을까 싶다. 왜 야구가 좋은지를 물었다. “목표의식이 생겨서 좋아요. 운동을 위해 술도 적게 마셔 좋고요. 여러 전문가가 분업과 협업을 통해 뭔가를 이뤄간다는 점도 마음에 들어요. 아, 사업요? 의도한 건 아닌데 같은 일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니 업무 협조에 도움이 되지요. 작가분들한테 원고 받기도 수월해지고. 개인적으론 데이터를 쌓아가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기록을 쌓고 이뤄가는 맛이라고나 할까요. 야구는 기록 빼면 재미없잖아요.”
그는 지금도 야구만 생각하면 설레고 흥분된다고 한다. “설레는 느낌요? 아, 장난 아닙니다. 비 올까 조바심이 나 잠이 안 올 정도예요. 선수 출신을 어떻게 잡을까 궁리하다 보면 정말 즐겁습니다.”
‘4회 제한 안타깝다’는 시의 내용은 현재 분당리그에서 선수들의 균등한 출전 기회 보장을 위해 1인당 4회까지만 투구를 허용하기 때문에 나왔다.
대화 내내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듬뿍듬뿍 묻어났다. 나이 마흔에 ‘어릴 적 첫사랑’을 다시 만난 이 사내. 그 사랑이 불혹을 넘은 나이에도 20대 못지않은 활기와 에너지를 끌어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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