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0월은 정녕 화사하고 화려한 달이었다. 불볕 아래서 농부들이 흘린 땀, 그 땀방울이 결실로 가시화되는 은총과 축복의 계절이다. 그러나 우리 농촌의 우울한 실상과 국내외 불투명한 경제 및 정치 때문에 배알 없이 흔쾌하게 즐거움을 구가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는 더욱 의연하게 평상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투명한 공기와 쾌청한 날씨에 전국은 말 그대로 천자만홍(千紫萬紅), 무심한 자연경관도 그러하지만 각종 전시와 음악회 체육대회 등 문화행사는 우리를 달래며 지치고 찌든 일상에 흥과 생기를 준다. 우리 인간은 기쁠 때만 아니라 슬플 때도 술을 가까이 하며 노래를 부른다. 해서 새의 지저귐은 때로는 울음, 때론 노래가 된다. 춘향전 내 이몽룡의 풍자시 한 구절처럼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은 것’이런가. 전국이 떠들썩한 자못 술 취한 듯 고조된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지친 일상에 생기 주는 문화행사
1979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시대의 초상화’전을 열었다. 그 후 32년 만에 우리 것만이 아닌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 초상화까지 포함한 대규모 ‘초상화의 비밀’(9월 27일∼11월 6일) 특별전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6주에 걸쳐 대성황을 이루었으나 아쉽게도 11월 6일, 내일이면 끝난다. 그러나 회화실에는 몇 년 만에 조선시대 문인화의 정수이자 백미로 상찬되는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가 현재 일반에게 공개돼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계절에 정말 어울리는 그림이다. 불과 일주일 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10월 27일∼2012년 1월 15일)을 통해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림만이 아닌, 청대 명사 16명의 제시까지 쫙 펼쳐져 입소문으로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계절적 요인도 없지 않으리라.
또 지금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오랜만에 조선시대 빛나는 대표적 명화를 모은 대규모 그림 전시인 ‘화원’이 열리고 있어 모처럼 우리 눈이 전에 없던 호사를 누린다.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워진다. 특히 올해 전통미술 가운데 서화를 주제로 한 공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의 여러 기획전이 돋보인다.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에선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10월 25일∼11월 20일)이 개최되고 있다. 그 첫 전시 장소인 국립중앙박물관은 여름 잦은 비에도 불구하고 전시기간(6월 18일∼7월 17일) 내내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는 2009년 가을 일본에서 잠시 귀국해 9일간 전시된 조선 초 최고의 명화인 ‘몽유도원도’ 열기에 버금가니 토요일은 관람객이 2만5000명을 넘기도 했다.
풍속인물전, 미술품열기 대미 장식
바야흐로 우리 미술품 열기의 절정으로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지난 일요일 끝난 간송미술관 81회 기획전인 풍속인물전이었다. 매년 봄 가을로 2주씩 특별전을 열어 개관한 지 만 40년 만이다. 전시 마지막 날엔 5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인류가 남긴 걸작과 명품은 그 안에 각 민족의 정서와 정체성이 담겨 있다. 우리 옛 그림은 맑고 밝은, 낙천적인 민족성을 일깨운다. 명품과의 만남은 이를 체득하는 것이다. 침묵의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가장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던가. 기다림은 꿈이 자라며 성숙이 진행 중인 고귀한 시간, 그래서 우리에겐 비로소 내일이, 미래가 존재한다.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기다림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