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맥과이어’(1996년) 중에서 》
초등학교 4학년 때. 바이올린을 배우러 다닌 노인 댁 거실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 어째서인지 약속한 시간에 레슨을 시작하는 날이 드물었고, 기다리는 아이들이 읽도록 놔둔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쪼그려 앉아 거듭 뒤적인 책들의 기억이 25년을 헤아려 넘긴 지금도 선명하다. 거기서 만화인줄 알고 집어든 것 중 ‘이 빠진 동그라미’에 대한 그림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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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이게 아닌데’ 싶어진 동그라미와 조각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놓는다. 그리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이야기. 아마도.
태어나 살아가는 날은 제각각이다. 저마다의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까지 누구나 딱 한 번씩만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있다. 처음으로 몸을 뒤집어 어리둥절 박수를 받은 날. “엄마”라고 옹알거렸다고 엄마가 아빠에게 우긴 날. 어설픈 젓가락질에 성공해 식탁을 난장판으로 만든 날. 자전거에서 보조바퀴를 떼어냈다가 곧바로 넘어져 통곡한 날.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마음속 흠에 채워 넣은 날.
딱 한 번. 사람으로 북적이는 커다란 공간에서 시야에 또렷이 들어오는 것이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일 뿐인 순간을 지난다.
어울리는 고백의 문장은 뭘까. 당신이 좋아. 당신이 필요해. 당신을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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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omplete me.”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직업윤리를 설파했다가 일터에서 쫓겨난 자신을 믿고 따라준 조각에 대한 고백이다.
애써 어떤 조각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온전한 원형을 이뤘다고 자신하는 시간. 신나게 구른다. 원래 없던 것을 원래 있어야 했던 것이라 착각한 채. 무엇이 눈앞을 지나치는지 살피지 않으며. 무엇이 나 또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지 귀담아 듣거나 눈여겨보려 하지 않으며. 정체 모르게 이지러졌던 자신을 매끈한 동그라미로 완성해준 그 조각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며 느끼고 있는지조차 잊은 채 그저, 구른다. 온전한 원형은 충실히 굴러야 한다며. 처음부터 혼자서도 온전한 동그라미였던 양.
덜컹덜컹 비틀비틀. 다시, 구른다. 채웠다 비워진 흠이 울퉁불퉁해져서 한 바퀴 구르기도 아슬아슬 불안하다. 돌부리나 웅덩이를 겨우 넘어온 저녁에는 ‘이제 그냥 그만 구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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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g06@gmail.com
krag 동아일보 기자. 조각가 음악가 의사를 꿈꾸다가 뜬금없이 건축을 공부한 뒤 글 쓰며 밥 벌어 살고 있다. 삶은 홀로 무자맥질. 취미는 가사노동. 음악과 영화 덕에 그래도 가끔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