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시작한 발레… 즐길 시간 짧아 너무 아쉬워요”
올 6월 뉴욕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발레 지젤 공연 당시 여주인공으로 열연한 서희 씨(오른쪽). 동아일보DB
등급과 관계없이 발레단에서 ‘중용’된 지도 오래다. 2009년 7월 코르드발레로는 이례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을 맡았고 올 6월에는 ABT의 간판 레퍼토리 공연이자 낭만 발레의 대표작인 ‘지젤’의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6주의 여름휴가 기간을 맞아 국내에 머물고 있는 그를 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국내에선 롯데백화점 TV광고 모델로 더 친숙한 그의 얼굴은 ‘자체발광’. 환한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지젤 공연부터 물었다.
“지젤은 우리 발레단이 매년 무대에 올리는 작품인 데다 지난 5년간 대부분의 역할을 다 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보고 아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달랐어요. 깊이 알수록 발레가 어려워요. 작은 동작도 하나하나 허투루 쓰이는 게 없죠.”
스스로 매사에 무덤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지젤 무대에선 달랐다고 했다. “주역으로 데뷔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때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님이 보러 오셨는데 공연이 끝나고 눈물을 글썽이시더라고요. 그때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커튼콜 때 관객을 향해 먼저 인사하고 뒤로 돌아 코르드발레를 향해 인사하는데 갑자기 울컥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발레 공연을 만드는구나 정말 고맙기도 하고, 과거 그들 속에서 고생했던 기억도 떠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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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나 외국의 소규모 발레단에선 재능 있는 단원이 코르드발레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주역 단계로 올라가기도 하거든요. 너무 힘들어 ‘나도 그랬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런 힘든 시간들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죠.”
현지 언론의 평가 중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작품을 잘 이해했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그건 발레리나에겐 가장 큰 칭찬”이라고 말했다. 테크닉이 완벽해야 비로소 연기에 눈을 돌릴 수 있고, 연기가 완벽해야 작품 전체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는 것.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그는 닮고 싶은 무용수로 ABT 간판 무용수였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63)를 꼽았다. 1985년 영화 ‘백야’의 주인공으로도 출연해 유명한 무용수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가끔 현대 발레 무대에 서기도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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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꼽은 또 다른 한 명은 현재 ABT의 간판 무용수인 줄리 켄트(42)다. “아이 둘의 엄마인데도 여전히 무대에 서는 걸 보면 존경스럽죠. 무용수도 힘이 좋은 유형, 관능미가 뛰어난 유형 등 다양해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해요. 전 여성성을 중시하는데 줄리 켄트야말로 여성다움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죠.”
예술가의 경지에 오르려면 뭐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상상력”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상상력에 따라 몸이 만들어내는 선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이 이어졌다.
늘 하는 발레지만 요즘 들어 그는 발레에 더 푹 빠져 있다고 했다. “매일 똑같이 연습을 반복하지만 매번 내 몸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아가요. 남보다 발레를 늦게 시작한 게 너무 후회돼요. 발레리나 수명을 서른 중반까지로 보면 앞으로 발레를 할 수 있는 시간이 10여 년밖에 안 남았잖아요.”
서 씨는 15일 일본 도쿄에서 유니버설발레단과 함께 지젤 공연을 마치고 16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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