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어느 날 새벽 딸아이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아이의 방문을 살짝 열어봤습니다. 아이는 MP3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검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무얼 그렇게 열심히 듣는지 물었습니다. “비틀스 모음집이에요. 난 예스터데이를 들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슬퍼져요.” ‘아!’ 비틀스였습니다. 40여 년 전 어머니가 그렇게 미워했던 비틀스, 두 동강 난 기타와 함께 영원히 기억에 남을 비틀스. 그들의 명곡 ‘예스터데이’가 죽지 않고 딸아이에게까지 유산으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MP3를 빼앗아 창밖으로 내동댕이치는 대신 살짝 웃어줬습니다.
비틀스 음악 듣는 딸 보니 뭉클
딸아이가 좋아하는 음악이 요즘 애들이 즐겨 부르는 힙합과 랩송이 아니라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날 새벽 저와 딸아이는 이어폰을 하나씩 귀에 꽂고 비틀스 노래를 들었습니다. 좋은 음악은 세월이 지나도 오랜 친구처럼 남습니다. 빅뱅과 원더걸스도 좋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콧노래로 들었던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들을 때면 가슴이 뜁니다. 산울림 김창완의 ‘너의 의미’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도 감동을 줍니다. 빅뱅과 소녀시대의 노래도 많은 시간이 흐르면 남도(南道)의 창(唱)처럼 낯설게 느껴지게 되겠지만 몇 사람이라도 비틀스와 박인환, 김광석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내셔널갤러리와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초상화박물관 등 아이가 보고 싶어 했던 박물관과 미술관을 순례하고 호텔방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신경통을 앓는 할머니처럼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시차와 통증으로 새벽에 깨어난 우리 부녀는 등을 맞대고 책을 읽으며 “여행 와서 이렇게 열심히 독서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며 웃었습니다.
영국 국회의사당 앞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학살한 이스라엘과 이라크를 침공한 영국 정부에 항의하는 시민단체가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약소국 인권을 위해 한 달 넘게 천막시위를 벌이는 모습에 감동한 아이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무엇보다 딸아이에게 충격을 준 것은 영국 지하철에서의 뜨거운 독서 열기였습니다. 우리 지하철에서는 승객 대부분이 졸고 있거나 조급증 환자처럼 휴대전화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을 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대영도서관의 규모에 놀라기도 하고, 청교도혁명을 이끈 올리버 크롬웰이 케임브리지대학 시절 살았다는 기숙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딸과 여행하며 서로 다른점 이해
영국 여행이 끝나갈 무렵 딸아이가 뚜렷한 주관과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저에게 얼마나 인정받으려 노력하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지만 막상 저는 칭찬과 격려가 인색한, 완벽만 요구했던 엄격한 아버지였습니다. 아이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자 아이도 제게 가졌던 서운함을 조금씩 씻었습니다. 신뢰감을 회복하게 된 우리 부녀는 연인처럼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저와 아이는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겠지만 여행이 우리에게 새로운 신뢰와 대화의 통로를 만들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더 늦기 전에 아이와 여행을 떠나길 바랍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