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민영 문화부
KBS2 ‘스파이 명월’의 여주인공 한예슬 씨가 드라마를 찍다 말고 미국으로 떠나버리자 방송 일정은 곧바로 파행으로 치달았다. 한 씨 측이 16일 “다시 귀국해 촬영에 임하겠다”고 밝혀 드라마 방송 도중에 여주인공의 얼굴이 바뀌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사태의 1차적 책임은 한 씨에게 있다. 선배 탤런트 박원숙 씨가 2003년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잃고서도 장례 절차가 끝나자마자 퉁퉁 부은 눈으로 촬영장에 나타났던 일화와도 비교된다. 원로 연기자 이순재 씨도 이날 열린 MBC 주말극 ‘천 번의 입맞춤’ 제작발표회에서 한 씨 사태와 관련된 질문에 “우리(배우)의 행위는 시청자와의 약속이다. 배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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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배우들은 많은 경우 말 그대로 ‘목숨 걸고’ 드라마를 찍는다. SBS ‘무사 백동수’에 나오는 배우 유승호는 지난달 29일 빗길에 차량이 대파되는 교통사고로 왼쪽 광대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고도 인근 병원에서 간단한 응급 처치만 받고 촬영장에 복귀했다. KBS2 ‘공주의 남자’의 홍수현과 MBC ‘넌 내게 반했어’의 박신혜도 최근 아찔한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모두 ‘부상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에게 목숨 걸고 한류 열풍을 일궈냈다며 박수라도 보내야 할까.
무리한 촬영 일정으로 배우가 다치고 방송 사고라도 나면 모두들 ‘생방송 제작’ 현실이 문제이며 사전 제작만이 해결책이라고 제시한다. 하지만 방송사는 여전히 편성을 미루며 제작사에 사전 제작할 여유를 주지 않고, 제작사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스케줄을 쥐어짠다.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류가 실핏줄처럼 세계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가는 동안 열악한 제작 환경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건 한 씨의 경솔한 행동 못지않게 부끄러운 일이다.
곽민영 문화부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