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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선거의 추억

입력 | 2011-08-10 03:00:00


배인준 주필

2002년 12월 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57만 표(2.3%) 차로 져 대통령 재수(再修)에도 실패했다. 근본 패인은 아니더라도 김종필에게 도와달라고 머리를 숙였더라면, 그리고 본인 친인척과 선거캠프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운신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지적도 있었다. 노무현의 승인 역시 복합적이지만 노사모와 반창(反昌) 진영이 선거 당일 오후 몇 시간 죽을힘을 다해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동원해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뛰어가게 한 것도 주효했다.

올해 4월 27일 손학규는 경기 성남시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강재섭을 2.7%포인트 차로 누르고 당선했다. 그의 승리는 분당좌파라는 말을 고착화시키며 보수층 민심의 이반을 상징하는 것처럼 해석됐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선거 초장에 조윤선 같은 ‘신선한’ 후보를 내세웠더라면 손학규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며 출마해도 패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강재섭이더라도 한나라당이 초반부터 일사불란하게 밀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손학규가 한 살 많고 대학 2년 선배인데도 강재섭이 ‘올드보이 이미지’로 손해를 봤다. 패션과 ‘사진발’ 차이가 있었다는 말도 나왔다. 손학규가 잠재적 대통령 후보라는 점도 표심에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강원도지사 보궐선거에서는 투표일을 불과 5일 앞두고 강릉에서 불거진 자원봉사자들의 불법 전화홍보 사건이 엄기영에게 치명타가 됐다. 도지사 후보 공천 과정에서 청와대는 뉴스앵커 엄기영의 지명도와 인기에 ‘필’이 꽂혀 있었고 그의 영입에 집착했다. 그러나 최문순은 민심의 밑바닥을 훨씬 깊이 파고들었고, ‘선배이면 경쟁자도 형님으로 깍듯이 대하는’(KBS 전 간부의 말) 친화력이랄까 인간경영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승패 가르는 요인은 각양각색

어떤 사람은 잘나서 이기고, 어떤 사람은 못나서 이기기도 하는 것이 선거라면 지구가 둥글듯이 선거도 둥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건의 유불리(有不利)라는 것도 정치논평자들의 해석과 실제 결과는 다를 때가 많다. 지난주 우연히 원로언론인, 여성기업인 등과 동석한 일이 있는데 거기서도 내년 선거가 화제에 올랐다. 박근혜에 대해 한 사람은 “결혼 육아 경험이 없는 것은 약점”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자식 때문에 망하는 사람도 많지 않으냐? 미혼이 큰 정치를 잘할 수 있는 조건도 된다”고 했다.

대선이건 총선이건 이긴 쪽은 예외 없이 “위대한 민의의 승리”라고 외친다. 그런데 2002년 노무현을 당선시킨 위대한 민의가 노무현 정치에 질려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민의로 변했다. 민심의 이 같은 표변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정동영을 531만 표 차로 압도하는 동력이 됐다. 이에 놀란 좌파는 “적어도 10년 안에는 진보의 재기가 어렵겠다”며 잠복하는 듯했고, 친노세력은 스스로 ‘폐족(廢族)’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명박의 기록적 대승은 불과 3년여 사이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고, 한나라당은 내년 선거의 나쁜 예감에 전전긍긍하며 ‘이명박 부정(否定)’의 수위와 속도를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두언처럼 “20대는 (한나라당을) 재수 없다고 하고, 30대는 죽이고 싶다고 한다”고 공언하는 것은 한나라당의 재기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나쁜 민심을 증폭 고착시키는 자해(自害)가 되기 쉽다. 사려 깊은 어느 인사는 한나라당에 대해 “미꾸라지 통에 간(왕소금) 쳐놓은 것 같다. 저마다 자기만 살려고 파닥거린다고 살길이 생기겠느냐”고 말했다. 요즘 정치판은 민주노동당이 어젠다(의제)와 이슈를 만들어 띄우면 민주당이 곁불을 쬐고 한나라당이 3등으로 따라붙는 형국이라고 누군가가 꼬집었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한나라당표 신제품’이 없다는 것이 여당의 진짜 위기다. 민심을 빨아들일 한나라당 프레임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理性 아닌 감성적 표심 낚기 전쟁

표심이란 것은 결과로써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갈라놓는다는 점에서 위력적이고,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권자가 언제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 에머리대 행동과학심리학 교수 드루 웨스턴은 ‘정치적 뇌―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서의 역할’이란 책에서 “정치적인 뇌는 정서적이며, 숫자나 사실이 아니라 감정에 반응한다”며 여러 논거를 댔다. 투표자들은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후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후보에게 끌린다는 얘기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은 장인의 좌익활동이 자신의 정치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문제 제기를 “그럼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인가”라는 논지(論旨) 이탈로 돌파했다. 궤변이요, 말의 속임수이지만 상당수 유권자는 “노무현, 멋지다”로 돌아섰다.

19대 총선(내년 4월 11일)이 8개월 앞으로, 18대 대선(내년 12월 19일)이 1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