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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공부/SCHOOL DIARY]아빠의 마음 움직인 초등생 ‘구매 보고서’

입력 | 2011-07-19 03:00:00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갖고 싶은 게 참 많다. ‘이거 사 달라’는 아이와 ‘절대 안 된다’로 응수하는 부모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 진부하고도 친숙한 우리네 가정의 모습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갖고 싶은 전자기기를 손에 얻은 한 아이가 있다. 아버지에게 보낸 놀라운 보고서 덕분이다.

두 아들의 아버지인 강모 씨(49·서울 노원구). 어느 금요일 저녁, 저녁을 먹은 뒤 거실 소파에서 쉬던 강 씨에게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아들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들은 허리 뒤춤에 감추고 있던 A4 종이 두 장을 슥 건네고는 “보세요”라며 잽싸게 방으로 사라졌다. 종이 앞장엔 ‘아이리버 커버스토리 구매 보고서’란 제목과 함께 ‘잘 읽어주시고 잘 판단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구매 보고서? 강 씨는 난생 처음 아들에게 받은 의문의 보고서를 훑어본 뒤 아들의 영민함과 깜찍함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단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해 전자책(e북)을 볼 수 있는 단말기를 갖고 싶었던 아들. 자신이 왜, 얼마나 이 기기가 필요하며 이 기기를 잘 활용했을 때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문서로 정리해온 것이다. 한마디로 “사 달라”는 이야기다.

바닥에 드러누워 무조건 떼를 쓰는 ‘아이’의 방식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어른’의 방식으로 자신의 소망을 전달하려는 시도만 해도 가상한데, 이 보고서, 구성과 내용도 범상치 않다. 전자책 단말기의 개념정의, 필요성, 기기의 장점, 가격, 이용계획까지 기승전결을 갖췄다. 제품 이미지도 사진으로 적절히 첨부했다.

‘똑’ 소리 나는 대목은 어린이가 왜 전자책 단말기가 필요한지를 역설한 부분. 내용인즉슨 이렇다. ‘이 제품을 사려는 목적은 야외에서 책을 들고 다니는 게 무겁고, 전자책을 경험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무슨 전자책이냐고 할 수 있지만, 어른들은 자신의 어릴 때와 지금 아이들의 생각이 다르며, 디지털 사회를 어린이들이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기특한 협상 조건도 내걸었다. ‘구매 시 나의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투자한다’ ‘쉬는 시간에 커버스토리로 책을 읽는다’ ‘구매 시 생일선물은 안 사주셔도 된다’ 등. 협상의 기술을 좀 아는 녀석이다. 게다가 ‘사랑의 쿠폰’ 2장도 덧붙였다. 안마 또는 발 주무르기 1회 이용권, 시키는 일 무엇이든지 다해주기 1회 이용권이 바로 그것. 기간은 넉넉하게 2012년까지다. 막내아들의 이런 사랑스러운 행동에 안 넘어갈 부모가 얼마나 될까!

강 씨는 당일 밤 바로 해당 제품을 온라인을 통해 구입했다. 무조건 사달라고 조르는 게 아니라 조목조목 보고서를 정리해온 모습을 보니 ‘전자기기도 무분별하게 사용하진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

아들의 말도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단다. 교과서도 디지털로 바뀌는 시대 아닌가. 새로운 기기와 문화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보고서 속 아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고. 이 보고서는 그냥 보고서가 아니다. 디지털 DNA를 가졌다는 99년생 아들과 어린 시절 컴퓨터란 게 뭔지도 몰랐던 60년대생 아버지를 이어준 놀라운 보고서다.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다가가려면 어떤 소통도구를 사용해야 할까. 한번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장재원 기자 jj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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