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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한국인들, 다이내믹-허스키 보이스에 꽂히다

입력 | 2011-07-09 03:00:00

■ 대중의 가슴을 흔든 목소리 분석해 보니




왼쪽부터 가수 이은미, 박정현, 임재범, 아이유, 백지영

궁금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목소리란 게 있을까?’

조금 더 생각을 하자 목소리 하나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가수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수많은 대중의 공감을 부르고,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무엇인가 통(通)하는 게 있을 듯했다. 그 속에 숨겨진 비밀들을 들춰보고 싶어졌다.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대상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했던 여자 가수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음원포털 ‘벅스’에 조사대상 선정을 의뢰했다. 1960년대의 이미자부터 최근 가장 ‘핫’ 한 아이유까지 연대별 5명씩 모두 25명의 여가수와 그들의 대표곡 1곡씩이 선정됐다. 벅스 측은 “대중적으로 3곡 이상을 크게 히트시킨 아티스트 중 지명도, 시대적 영향력, 장르의 독보성 등을 고려해 대상자를 뽑았다”고 밝혔다. 특정 가수의 목소리를 분석해야 하는 특성상 핑클이나 소녀시대 등 그룹은 조사에서 제외했다.

목소리 분석은 충북도립대 생체신호분석연구실 조동욱 교수(전자정보계열)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틀 만인 7일 조 교수로부터 분석 결과가 도착했다.

마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사회자가 최종 우승자 이름이 적힌 봉투를 개봉하듯 조심스레 e메일을 열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목소리에는 과연 어떤 공통점이 있었을까.

○ 원맨밴드 같은 능력으로 폭넓은 음역 소화

조 교수 연구팀은 각 가수의 대표곡 중 후렴 부분 9∼10초를 추출해 피치(Pitch·초당 성대 진동횟수·Hz)와 인텐시티(Intensity·목소리 강도·dB), 스펙트로그램(Spectrogram·시간대별 주파수 변화·Hz) 등을 분석했다. 피치 값은 소리의 높낮이, 인텐시티는 세기, 스펙트로그램은 몸속 소리기관들에서 나는 공명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판단하는 데 쓰이는 지표다.

가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피치 값의 변동 폭(최대값―최소값)에서 나왔다. 대표 가수들의 평균치는 419.82. 변동 폭이 가장 큰 양희은은 451.57이나 됐다. 피치 값의 변동 폭이 크다는 것은 가수가 성대를 이용해 음의 높낮이를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 구사할 수 있는 음폭이 넓다는 것과 같다.

조 교수는 “일반적인 대화상황이 아닌 노래하는 동안의 목소리 피치 변화가 명확히 연구된 바는 없으나 400Hz 이상의 변동 폭은 일반인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수준”이라며 “노래를 할 때 피치의 변화를 많이 주면 듣는 이로 하여금 아주 좋은 소리로 들린다”고 설명했다. 목소리 높낮이의 오르내림이 클수록, 즉 다이내믹한 목소리일수록 호소력이 커진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것은 이웃나라 일본의 최고 가수 3명의 평균 피치 값 변동 폭은 한국 가수들보다 다소 낮은 412.38이었다는 점이다.

스펙트로그램 분석에서는 대표 가수들의 ‘가창력’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스펙트로그램은 시간에 따라 목소리의 주파수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즉 가수의 호흡과 주파수(음역대 사용)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온전히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만을 측정하는 피치 값과 달리 스펙트로그램의 주파수는 목소리가 얼굴, 코, 광대뼈 등의 공명기관에서 얼마나 증폭되는지를 보여준다.

조 교수가 과거에 별도로 실시한 실험에 따르면 가수들의 호흡은 꽉 찬 상태로(밀도 있게) 길게 이어지며, 그들은 낮은 음역에서 높은 음역(일부는 1만9000Hz 이상)까지를 모두 소화한다. ‘한 노래’ 한다는 일반인들도 가수보다는 호흡이 얕으며, 최고 주파수는 1만 Hz대 초반밖에 되지 않는다. 또 같은 가수라도 가창력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호흡은 폐활량과는 다르다. 가수들은 횡경막 호흡을 통해 노래를 끊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 부른다. 4분의 4박자 노래의 경우 네 마디를 중간에 쉼 없이 부르는데, 이를 프레이즈 처리를 잘한다고 한다. 또 노래를 잘하려면 공명을 잘해야 하는데, 공명기관은 얼굴의 코와 광대뼈 등에 위치한다. 공명기관을 잘 이용해야 저음부터 고음까지 넓은 폭의 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다.

조 교수팀은 또 다른 실험에서 조수미와 조용필의 음원을 분석한 바 있다. 이들은 혼자 힘으로 보통 사람은 흉내 내기 어려운 폭넓은 음역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혼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에 해당하는 ‘화음’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한 시대를 대표한 인기가수는 자신의 몸이란 ‘악기’를 이용해 다양한 음역의 소리를 내는, 마치 ‘원 맨 밴드’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은 가수가 일반인보다 훨씬 아름다운 소리를 전달할 수 있게 해 준다. 조 교수는 “조수미와 조용필은 개인의 역량으로, 아이돌 그룹은 멤버 여러 명의 역량으로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인이 사랑했던 가수들은 목소리의 강도를 조절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목소리 세기가 가장 컸을 때와 약했을 때의 차이(인텐시티 변동폭)가 평균 17.17dB로 일본 가수(11.18dB)보다 훨씬 높았다. 20dB 이상 차이가 나는 가수도 8명이나 됐다. 목소리 강도가 짧은 시간 내에 크게 변하면 훨씬 풍부한 감정을 느끼기 쉽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 이것 역시 다이내믹한 목소리가 인기를 얻는다는 것을 부연해 준다. 최근 ‘나는 가수다’란 TV 프로그램에서 일부 가수가 목소리 크기의 변화가 많을수록 청중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었고, 이에 따라 ‘지르기’식 편곡이 득세했다는 일부의 해석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 조용필 임재범 아이유, 쉰 목소리로 대중 사로잡아 ▼

○ 호소력 짙은 탁성의 마력

목소리 전문가들 중에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목소리의 특성 중 ‘탁성(濁聲)’에 주목하는 이가 많다. 국악에서는 ‘중성(中聲)’을 기준으로 그보다 한 옥타브가 높으면 ‘청성(淸聲)’, 한 옥타브가 낮으면 탁성이라고 한다. 탁성은 일반적으로는 ‘허스키 보이스’로도 불리며 약간 거친 듯한 ‘쉰 목소리’를 일컫기도 한다. 탁성 역시 맑고 깨끗한 목소리에 비해 변화가 많기 때문에 다이내믹한 소리를 선호하는 한국인의 정서와 맞아떨어진다는 분석이다. 또 단지 맑기만 한 목소리보다 감정적 호소력이 더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렬한 호소력이 특징인 록 음악이나 미국 흑인들의 솔(soul) 장르에서도 탁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제 벅스가 뽑은 25명의 여가수 중에도 윤시내 이은하 백지영 등 허스키 보이스의 소유자가 대거 포함돼 있다. 최근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이유도 허스키 보이스로 분류된다.

남자 가수들의 경우를 보면 탁성의 대가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가왕’ 조용필, 요절한 ‘천재 보컬리스트’ 김현식, 최근 핫이슈로 떠오른 임재범까지 모두 개성 넘치는 탁성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은 인물이다.

이들의 목소리에는 강한 목소리 톤과 함께 주변의 잡음들이 오묘하게 섞여 마치 여러 목소리가 화음을 이룬 듯한 매력을 뽐낸다.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최홍식 교수(이비인후과·음성언어의학연구소장)는 “탁성이라는 음색을 스펙트로그램이나 높낮이, 강도 등 일반적 지표만으로 쉽게 구분해내기는 힘들지만 음의 불규칙성을 토대로 어느 정도는 판단이 가능하다”며 “목 관리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많은 유명 가수에게서 탁성의 특징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

○ 탁성의 뿌리, 판소리

판소리는 거칠고 탁한 ‘쉰 목소리’를 근간으로 한다. 또한 발성기교와 음색이 시시각각 변할 때 예술성이 극대화된다. 사진은 송순섭 명창의 ‘적벽가’ 완창무대. 동아일보 DB

탁성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은 전통 음악장르인 판소리에서 잘 드러난다. 판소리에서는 탁성이라는 표현 대신 ‘곰삭은 소리’(충분히 삭은 소리)라고 한다. 서양음악에 뿌리를 둔 오페라 가수들은 성대를 극도로 보호하며 맑고 깨끗한 소리를 중시하는 반면, 판소리 수련을 위해서는 맑은 목소리를 거칠고 탁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 과제다. 특히 남성적인 동편제가 여성적인 서편제에 비해 탁한 소리를 더 많이 활용한다.

최동현 군산대 교수(국어국문학)는 “판소리가 기본적으로 쉰 소리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성악과는 확연히 다른 미적 기준을 갖고 있다”며 “판소리의 예술성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보일 때 참다운 가치가 발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은 이미 예전부터 다양한 소리가 역동적으로 발현되는 모습에 매료돼 왔던 셈이다.

임진택 명창(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은 “판소리는 정확히 말해 온몸의 기운을 뽑아 올리면서 하는 소리로 그 결과물로 탁한 소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쉰 소리를 내는 판소리 명창들의 목 상태는 어떠했을까.

전북대병원의 홍기환 교수(이비인후과)는 소리꾼 23명과 성악가 21명을 대상으로 GRBAS 스케일을 조사했다. 탁성의 여부를 판별하는 방법 중 하나인 GRBAS는 G(grade·총괄적인 인상), R(rough·거친 소리와 불규칙한 성대 진동 등), B(breathy·공기 새는 소리 등), A(asthenic·힘이 없는 연약한 목소리 등), S(strained·성대의 과다긴장과 비정상적 단단함 등) 각각에 0∼3의 등급을 매기는 방식. 조사 결과 소리꾼들은 A 지표를 제외한 G, R, B, S 점수가 모두 높았다.

그는 “소리꾼들의 80% 이상에게서 혹이나 결절 등 성대질환이 발견됐지만 성악가들에게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시대별로 좋아하는 목소리도 변한다?

시대나 사회 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선호되는 목소리 특징이 달라진다는 의견도 있다.

김형태 예송이비인후과 대표원장은 “여러 한계를 갖고 있는 한 번의 실험을 통해 ‘한국인이 좋아하는 목소리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짓기는 힘들다”며 “오히려 과거와 현대의 가수들이 그 시대 음악의 리듬과 운율에 얼마나 적합한 음색을 갖고 있는지가 (호감도 측면에서는) 더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노래는 리듬이 느리고 길어 화음이 풍부한 목소리가 적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독성 강한 반복 리듬을 소화할 수 있는 목소리가 선호된다는 얘기다.

보컬트레이너 조홍경 씨도 “한국인의 정서인 ‘한’을 표현하기 위해 거친 목소리를 내거나 노래를 좀 더 역동적으로 부를 때 대중이 더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가수의 목소리는 제각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목소리 자체가 아닌 감성과 감정”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스펙트로그램이나 발음의 안정도 등의 실험 결과를 보면 각 시대 가수들의 목소리가 보이는 특징이 ‘정(靜)적’에서 ‘동(動)적’으로 옮아가는 추세를 보인다”면서도 “이러한 특징들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장기간에 걸친 체계적인 실험과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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