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리더십 無능력 無절제… 350년 명문가 해가 지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 원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사리 통로의 내부(왼쪽). 벽에는 메디치 가문이 소장했던 예술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오른쪽 사진은 베키오 다리로 바사리 통로의 창문이 보인다. 원래 베키오 다리에는 정육점이 늘어서 있었지만 코시모 1세는 바사리 통로를 만들기 위해 정육점을 모두 없애고 그곳에 피렌체의 보석상들이 상점을 열게 했다. 지금도 베키오 다리 위에는 보석상이 즐비하다. 김상근 교수 제공
○ 바사리 통로에서 세상과 단절되다
코시모 3세
1565년, 그는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아들 부부가 사는 베키오 궁전부터 자신의 왕궁인 피티 궁전을 연결하는 전용 비밀 통로를 설치하도록 한 것이다.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로 부르는 이 비밀주랑은 피렌체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메디치 가문의 전용 도피통로로 설계됐다. 그래서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순 있지만 반대로 밖에서 안은 볼 수 없도록 돼 있다. 이때부터 메디치 사람들은 바사리 통로에 설치된 비밀스러운 창문을 통해 피렌체 사람들을 은밀히 감시했다. 폭군처럼 군림하는 것도 모자라 시민들을 통제하는 비밀스러운 감시자가 된 것이다.
광고 로드중
○ 당나귀를 타고 가던 코시모 데 메디치
만약 후대의 코시모들이 선대 코시모의 정신을 유산으로 계승했더라면 메디치 가문이 쉽게 패망의 길로 접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선대 코시모는 아버지의 유언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임종의 침상에서 조반니 디 비치는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다른 사람들이 널 주목하게 만들지 말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만약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면 꼭 필요한 곳에만 너의 모습을 보여줘라.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절대로 대중의 뜻에 거슬리게 행동하지 말라.”
아버지의 유언은 한마디로 신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하란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부가 축적되고 가문의 명예가 올라갈수록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선대 코시모는 절대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다. 협상을 하다가 의견 절충에 실패하면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게 아니라 웃으며 “그래요, 잘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코시모는 피렌체 시내에서 이동할 때 절대로 말을 타지 않았다. 말을 타고 다니면 피렌체 시민들과 노상(路上) 대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위화감이 조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코시모는 피렌체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늘 웃음으로 대했다. 장거리 이동 때는 말 대신 당나귀를 애용했다고 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겠다는 의지를 당나귀를 타고 가며 보여준 것이다.
광고 로드중
○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선물
가문의 대는 끊겼지만 가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21세기의 피렌체 사람들은 18세기 중엽에 문을 닫은 메디치 가문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시민들에게 남긴 막대한 문화유산 때문이다. 우피치 미술관과 피티 궁전 박물관에 소장된 예술품을 보려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의해 피렌체 시의 재정이 유지되고 있다.
위대한 정신은 위대한 가문을 낳았고 그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은 문을 닫았다. 메디치 가문은 정신의 위대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역사적 선례를 남겼을 뿐 아니라, 위대한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의 역사도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교훈이야말로 메디치 가문이 남긴 문화유산보다 더 값진 것인지 모른다. 탁월함을 추구하던 가문이 더는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을 때 그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 교수skk@yonsei.ac.kr@@@
정리=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DBR 웹사이트 www.dongabiz.com, 개인 구독 문의 02-721-7800, 단체 구독 문의 02-2020-0685
광고 로드중
모순상태가 이상적 문제해결 방안?
▼ TRIZ 컨설팅
‘지속가능성’ 통한 경쟁우위 전략
▼ MIT슬론매니지먼트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