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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소통]서예 - 사진 합동전 ‘권창륜 안승일의 산의 靈&氣’

입력 | 2011-05-03 03:00:00

쓰고 찍은 백두산, 장엄함은 같더라




서예가 권창륜 씨가 백두산에 올랐을 때 천 위에 쓴 ’천공교성’. 하늘이 공력을 다해 교묘하게 천지 만물을 완성했다는 뜻이다. 내용과 함께 글자의 조형이나 공간 구성에서 독창적 면모가 보인다. 서예박물관 제공

하늘에서 바라본 백두산이 태고의 신비를 드러낸다. 대형 사진 속의 우람한 등줄기, 섬세한 근육과 힘줄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안승일의 ‘백두산)

사진과 얼굴을 마주한 곳에는 ‘神市’라고 쓴 대형 붓글씨 작품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백두산 신단수에 자리한 ‘신시’는 우리 민족의 시원을 상징하는 성지. 백두산 정상에 오른 서예가는 현장에서 상형문자 시절 한자의 시원을 재해석한 서체로 길이 8m의 작품을 완성했다.(권창륜의 ‘신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내 서예박물관이 기획한 ‘권창륜 안승일의 산의 靈&氣’전은 산의 몸과 혼을 담은 글씨 및 사진의 ‘동행’을 보여준다. 산을 주제로 20여 년간 작업해온 서예가 초정 권창륜 씨(68)와 산악사진가 안승일 씨(65)의 만남을 모색한 전시다. 각기 다른 장르에서 작업해온 작가들이 산에서 얻은 영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비교할 수 있어 흥미롭다. 부대행사로 산악인 엄홍길 오은선 이명희 씨의 ‘산과 나’ 주제의 특강도 마련된다. 전시는 22일까지. 3000∼5000원. 02-580-1300

○서예와 사진이 통하다

근대 한국 서예의 두 거목인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에게서 서예와 전각을 사사한 권 씨는 5대 국새의 글씨를 비롯해 ‘인수문’ ‘운현궁’ 현판을 쓰는 등 현대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전국의 산을 등반한 뒤 현장에서 산의 호방한 기운과 정기를 필묵으로 담아낸다. 먹물 흐른 흔적이 드러난 글씨에서 산의 능선과 폭포 물줄기의 느낌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안 씨 역시 산의 매력을 표현하는 데 독보적이다. 그는 인위적 조작을 거부하고 원하는 사진을 얻고자 며칠이고 몇 년이고 뚝심 있게 기다려 절정의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백두산 한라산 삼각산 등 수없이 산을 다닌 끝에 완성된 작품은 전문산악인도 알기 힘든 비경에 관객을 데려간다.

전시는 이질적 기록도구라는 간극을 넘어 산에 대한 이들의 한결같은 존경과 동경이 어떻게 하나로 수렴되는지를 짚고 있다. 안 씨는 산의 형상을, 권 씨는 문자로 재해석된 산을 보여주지만 조형적 정신적 측면에서 산의 내면을 충실하게 부각시킨 작업이란 점에선 공통적이다. 가령 신새벽의 고요함, 경이로운 일출, 신비한 물안개에 휩싸인 백두산을 주목한 안 씨의 작품들. 권 씨가 백두산 정상에서 활달한 운필로 쓴 ‘靈峰(영봉·신령스러운 봉우리)’ ‘天工巧成(천공교성·하늘이 공력을 다해 교묘하게 천지만물을 완성했다)’ 등의 글씨와 절묘한 대구를 이룬다.

○산을 새롭게 만나다

산악사진가 안승일 씨의 ’백두산’은 산의 등줄기와 힘줄까지 담아낸 작품. 중국에서 한반도 쪽을 향해 촬영한 항공사진으로 우리가 흔히 보았던 백두산과 다른 울림을 준다.

백두산이 중심을 이루지만 다른 절경도 많다. 색면 추상처럼 강물에 잠겨 있는 일몰의 삼각산, 구름과 산이 겹겹이 어우러진 지리산, 구름 안으로 빨려드는 듯한 눈 쌓인 한라산 등. 안 씨의 앵글이 잡아낸 산의 이미지는 빼어나고 굳센 산하란 뜻의 ‘奇壯山河(기장산하)’란 권 씨의 작품과 함께 감상하면 느낌이 증폭된다. 글씨가 이미지를 받쳐주고, 이미지는 글의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이동국 학예사는 “열린 서예를 보여주자는 생각에서 붓과 카메라로 그린 산을 한자리에 모았다”며 “휴대전화에 사진과 문자의 기능이 공존하듯 같고도 다른 두 장르가 만나는 새로운 예술체험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대형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든 비좁은 전시장 여건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오래된 필기도구와 첨단 기록도구의 대화를 시도한 점에서 신선하다. 특히 활자와 이미지, 전통과 현대, 손과 기계의 만남에서 극과 극의 소통이 엿보인다. 관람객이 도심에서 산의 장엄함과 아기자기함, 산의 영혼과 대면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