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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는 지구인]②아이비리그 출신 사진작가 ‘마이클 허트'

입력 | 2011-04-26 15:46:26

"모순 덩어리 한국 사회를 좋아하는 이유는…"

●1994년 중학교 영어선생님으로, 지금은 연구자이자 사진작가
●"서구에서는 현재 아시아 붐…적극적으로 소통하자"




10년 가까이 한국에 거주한 마이클 허트는 한국어가 능통한 미국인이다.

"요즘 한국에 오는 (외국인)친구들 보면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우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영어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쉽지 않거든요. 제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는데 말이죠…허허."

한국의 '익스팻(expatriate · 현지 국적을 획득하지 못한 외국인)' 커뮤니티는 날로 팽창해 가고 있다. '익스팻'이란 주로 영어권 국가에서 온 이들은 영어 강의를 매개로 한국에 건너와 장기체류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들이 한국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이클 허트(39)는 20~30대가 대다수를 이루는 한국의 익스팻 사회에서 영화평론가인 '달시 파켓'과 함께 가장 오래 거주한 외국인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어도 유창한 편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에 거주하며 패션사진작가로 활약한 그는 때론 한국사회에 독설을 내뱉는 영문블로거로, 때론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열혈강사로 활약해 온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1994년 풀브라이트 재단의 지원으로 제주도 공립중학교에서 2년간 영어를 가르친 것이 처음이었어요. 당시 한국은 영어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막 느꼈을 때라서 외국인을 찾아보기 흔치 않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요."

■ 어머니의 나라, 영어강사로 첫발을 내딛고…

사실 허트 씨는 한국과의 인연은 보통의 외국인과는 동일 선상에서 비교될 수 없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이다(아버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당연히 한국어나 한국문화를 전혀 배우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철들고 난 이후 인종과 역사문제에 관심을 가진 그는 브라운 대학에서 역사를, 버클리 대학에서는 인류학을 공부하며 아시아학과 인종비교학을 자신의 박사주제로 삼았다. 2002년 한국을 다시 찾은 이유도 순전히 학위논문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당초 1980년대부터 1997년까지의 한국사회를 탐구했어요. 이 시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시기에요. 스포츠와 경제를 매개로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팽창하던 시대니까요. 전통적 사대주의와 일본에서 유입된 인종주의 그리고 국수주의가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증거들을 수집했어요."

지난 서울패션위크(SFW)에서 패션모델을 촬영중인 마이클 허트

그는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연구실을 뛰쳐나와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한국인들의 일상의 기록을 통해 한국사회를 탐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 '스트리트 포토그래퍼(거리 사진가)'로 활약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영어 쓰는 사람에게) 무척이나 친절하죠. 외국인이란 존재는 한국에서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에요. 그런데 아주 잠깐만 유지될 뿐입니다. 카메라를 사회의 구석진 곳에 향하는 순간 호의는 깨지고 적으로 돌변하거든요."

그가 서울의 빈민촌이나 홍등가에 시선을 돌리면 모두가 '외국인이니까 안된다'는 제지를 받아야 했다. 마치 전 국민이 국가의 홍보대사가 된 것 인양 예쁘고 좋은 것만 보이려고 노력하는 점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예정된 전시회나 출판이 취소되기도 했다.

"모든 선진국에 홍등가도 있고 거지도 있고 한국과 비슷한 사회문제 갖고 있습니다. 사회악이 있다고 해서 한국이 나쁜 나라라고 생각하는 외국인은 단 한 명도 없어요. 그저 한국사회의 애국심이 지나쳤던 거에요…"

마이클 허트가 바라본 한국의 '스트리트 패션'. 단순한 패션아이템이 아닌 그 속에서도 한국 사회의 다양한 함의들이 절묘하게 배치돼 있다. 외국인 눈으로 본 한국사회의 발견이 새롭다.

■ 거리사진에서 점차 패션사진으로 발전…

그는 한국사회에서 아마도 수십 년이 지나면 제대로 평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말한다. 그는 그 순간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사진에 입문한 그는 자연스럽게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5년부터는 명동 신촌 홍대 경복궁 등 가리지 않고 매일 나가서 3~4시간을 사진 찍으며 패션을 통해 한국 사회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피곤에 찌든 회사원, 명품으로 도배한 여대생, 거칠고 생기 넘치는 고등학생, 정체모를 정체성의 아줌마 패션 등 이들과 직접 부딪혀 가며 생생한 '스트리트 패션'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거리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재밌는 사실을 많이 발견합니다. 강남에서는 촬영섭외가 쉽지 않습니다. 취지를 아무리 잘 설명해도 말조차 안 섞으려는 분도 많죠. 신뢰 구축이 덜 된 사회라는 의미에요…여대 앞에 가면 '런웨이'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파격 패션을 마주쳐요. 명품에 대한 열망을 통해 한국 사회가 소비를 통해 계급상승을 꾀한다는…."

그는 자신의 탐구 보고서를 블로그 활동을 통해 폭넓게 풀어 온 일종의 '파워 블로그'다. 7명의 '스트리트 패션' 사진작가들과 함께 한 '핏맨 서울(Feetman Seoul)'이란 블로그(www.feetmanseoul.com), 한국 사회를 집중 해부한 '도시정치가(Metropolitician)' 등 다수의 블로그를 운영중이기도 하다.

허트의 패션 블로그 피트맨서울닷컴

한국의 대표적인 영문 블로거이다보니 2009년부터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한국의 공무원들이 한국을 홍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을 리 없다.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 SNS에 대한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한쪽 귀로 흘리더니 이제는 공무원들마다 트위터 페이스북 한다고 뒷북이다. 그마저도 영문 블로거들은 뒷전이고 홍보대행사를 통해 겉치레식 행사에 매진한다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가 서울이 국제행사로 키우고 싶은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하게 된 과정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독자수를 갖고 있는 패션 전문 영문 블로거였지만 막상 행사장에 진입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가장 손쉽게 한국의 패션을 해외로 소개할 수 있는 통로였지만 취재승인을 받는 과정은 험난한 인내를 요구했다. 결국은 실력과 꾸준함으로 2008년 이후부터는 패션 관련 행사에 자연스레 초청받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많이 개선됐다지만 그에게 한국 사회는 끊임없는 모순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 때마다 그는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일단 피부색이 가장 큰 문제가 됐죠. 하지만 저에겐 그것을 상쇄할만한 강력한 '백'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학벌'이더군요. 생각지도 않게 한국 사회에서 잘 통했어요."

그는 현재 자신의 직업이 '패션사진작가'라고 소개한다. 마이클 허트가 찍은 모델들.


■ 한국 사회의 이중성…다양성 인정으로 극복 가능

그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브라운'에서 학사를, 그리고 서부 명문인 버클리에서 석, 박사를 나온 일종의 엘리트에 속한다. 한국 사회에서 미국의 명문학교 학위가 활동에 가장 유리한 도구였음을 꼬집은 것이다.

실제 그는 생계를 위해 각종 외국어고등학교에서 미국사(史) 선생님으로 활약했다. 그가 출강하지 않은 명문외고가 없을 정도다. 물론 이 직업은 임시직이었지만 고소득일 뿐만 아니라 한국학생을 가장 근접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연구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개의 학교나 한 명의 학부모도 허트가 배운 '정통 미국식' 교육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씁쓸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오로지 SAT 성적만을 바라더군요. 저는 미국 역사 전문가에요. 미국 역사는 간단해서 차분하게 토론식 수업으로 진행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모두가 SAT시험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야단이었어요. 결국 성적으로 제 방식이 옳다는 것을 입증했지만 매번 힘든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외국인 (영어)노동자'에 대한 인식도 바꿔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외국인 강사들이 박봉을 감수하면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대마초 피우고, 쉽게 돈 벌고 있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죠. 최근에는 이들 (영어)노동자는 한국 사회의 약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소통했으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그는 '모순덩어리'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즐겁다. 따스한 인심, 역동적 사회, 첨단을 걷는 케이팝, 그리고 촌스러우면서도 깜짝 놀랄만한 컬러와 스타일을 뽐내는 패션 감각도 사랑한다.

그는 현재 자신을 '패션사진작가'라고 못 박았다.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다양한 직업과 삶을 경험했지만 자신의 영감을 자극하는 것은 여전히 패션사진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더 깊이 한국 사회에 천착을 하고 네트워킹 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저 뿐만이 아니에요. 미국 젊은이들은 1970~80년대에 새로움을 향해 영국과 프랑스로 향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압도적으로 '아시아'로 향하고 있어요. 절대 본국이 싫어서 탈출한 것이 아닌 도전과 자유를 즐기는 이들이에요. 잠깐 스쳐 지나간다는 편견을 버리고 또 다른 파트너란 생각을 가지면 어떨까요?"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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