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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Global/창업부터 세계시장 노리는 슈퍼 벤처]통신부품 제조업체 크루셜텍

입력 | 2011-04-08 03:00:00

“기술이 명함” 안락한 ‘三星울타리’ 탈출해 세계로




크루셜텍 충남 아산 공장의 OTP 생산라인.

동물원의 곰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 겨울이면 동면에 들어야 하는 야생 곰의 습성이 이처럼 바뀌는 것은 ‘사육의 안락함’ 탓이다.

크루셜텍도 한때 안락함에 젖은 동물원 곰이었다. 이 회사는 2001년 광통신 모듈 개발회사로 창업했다. ‘닷컴 버블’로 초고속인터넷 사용이 늘면서 광통신 모듈 수요도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회사를 차리자마자 거품은 꺼졌다. 광통신 모듈만 고집하다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갖고 있는 설비로 뭘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창업자 안건준 사장의 눈에 휴대전화 부품인 카메라 모듈이 띄었다. 빛을 다루는 기계란 측면에서 광통신 모듈과 닮은 점도 있었다. 거래처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세계 3위의 휴대전화 제조업체 삼성전자가 한국에 있었고, 안 사장은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 출신이었다. ‘친정’ 같던 삼성전자는 크루셜텍의 휴대전화 카메라 모듈을 모두 사줬고, 독점계약을 하며 이윤도 보장해줬다.

○ 서서히 중독되다


안건준 크루셜텍 사장이 2006년 처음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옵티컬트랙패드(OTP) 모듈을 들어보였다. 크루셜텍은 이 제품을 해외에 내다팔면서 삼성전자의 품을 벗어나 큰 성공을 거뒀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창업 1년 만에 문을 닫을 뻔했던 크루셜텍은 삼성전자 덕에 기사회생했다. 삼성전자는 내친김에 휴대전화 카메라용 플래시 모듈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크루셜텍은 이 두 부품을 납품하면서 2005년 50억 원대의 매출을 올렸다. 삼성전자가 요구하는 품질기준을 맞추고, 납기일만 지키면 돈이 들어왔다. 지난달 30일 경기 수원시 크루셜텍 중앙연구소에서 만난 안 사장은 “정말 편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5년. 크루셜텍의 지난해 매출 2079억 원 가운데 삼성전자에 힘입은 것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사이 회사는 40배 성장했지만 삼성전자 납품규모는 두 배 정도 늘어났을 뿐이다. 삼성전자 덕분에 성공한 회사가 삼성전자의 품을 벗어난 건 2006년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크루셜텍은 옵티컬트랙패드(OTP)라는 제품을 새로 만들었다. 작은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면 빛이 그 움직임을 인식해 마우스처럼 휴대전화 화면의 커서를 움직여주는 것이었다. 크루셜텍은 처음에는 이 제품도 당연히 삼성에 독점 공급하려고 했다. 하지만 OTP를 사용해 2006년 여름 바캉스 시즌에 맞춰 내놓기로 했던 삼성전자의 ‘핑거마우스폰’이 연말이 돼서야 출시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크루셜텍은 이때 신제품인 OTP를 만들어놓고도 6개월을 그냥 놀아야 했다. 대기업에 종속된 중소기업의 한계였다. 2005년 50억 원대였던 매출은 2006년에도 그 수준이었고, 2007년에도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동물원을 탈출하다


이때부터 안 사장은 해외로 뛰었다. 가진 것은 기술뿐이었다. 전화번호부 분량의 책자로 만든 제품의 상세 설명서와 무거운 노트북컴퓨터 가방을 양손에 든 채 블랙베리를 만드는 캐나다의 리서치인모션(RIM)이나 일본의 샤프 같은 회사를 쫓아다니며 트랙패드를 소개했다.

그는 “북미 사람들은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숫자를 보여주는 걸 좋아한다”며 “바이어를 만날 때마다 노트북을 펴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른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여줬다”고 했다.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로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느라 노트북 성능은 답답할 정도로 느려졌는데 오히려 이런 점이 RIM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안 사장은 10차례 이상 미국과 캐나다로 출장을 가 RIM의 바이어들에게 블랙베리에 쓰이는 ‘트랙볼’(구슬 형태의 마우스)을 OTP로 바꾸면 비용을 얼마나 절약할 수 있는지 집중 설명했다.

일본 샤프의 바이어를 설득할 때에는 아예 이 바이어를 충남 공장에 초대해 생산현장을 보여줬다. 안 사장은 창업 초기 “인재를 모셔오려면 연봉보다는 연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야 한다”며 연구시설과 생산설비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매출이 50억 원 남짓한 작은 회사였지만 깨끗한 공장과 자동화된 생산시설, 잘 정돈된 연구소를 둘러보고 이 같은 시설을 갖추게 된 철학에 대해 설명을 들은 샤프의 바이어는 즉석에서 크루셜텍과 계약했다.

크루셜텍은 RIM과 대만 HTC 등 주요 스마트폰 업체에 지난해 6500만 개의 OTP를 팔았다. 올해 판매 목표는 약 1억2200만 개. 이 회사는 앞으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미국에 지사도 만들고 OTP를 게임기의 조이스틱(조종장치)처럼 사용하는 게임도 내놓을 계획이다. 안 사장은 “단돈 2달러(OTP 1개 가격)만 더 내면 사용자가 지금의 스마트폰보다 훨씬 편리한 기능을 쓸 수 있다고 설득해 더 많은 OTP를 팔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마침 본업이었던 광통신 모듈도 최근 미국과 일본 등에서 초고속인터넷 설비투자가 늘면서 해외 매출이 늘고 있다.

안 사장은 “나는 해외 유학이나 주재원 생활도 해본 적 없는 순수 토종이지만 늘 세계시장을 바라보며 트렌드를 읽은 덕에 제때 필요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며 “한국이 사업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말하는 건 사업할 준비가 덜 된 사람의 핑계”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