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 기차여행
히사쓰센의 히토요시∼요시마쓰 구간에 감춰진 일본 최고의 차창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열차 이사부로 신페이호. 스위치백 2개 구간과 루프 1개, 터널 20개를 통과하며 해발 537m의 험준한 고개를 넘는다. JR규슈 제공
○ 구마가와 급류를 따르는 규슈횡단특급을 타고
오전 8시 20분 구마모토역. 내가 탈 규슈횡단특급 ‘구마가와 1호’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JR규슈의 상징 빛깔인 빨간색의 이 열차. 실내외가 특급답게 고급스럽다. ‘규슈횡단’이란 이름대로 아소 화산을 중심으로 북동과 남서에 포진한 벳푸(오이타 현)와 히토요시(구마모토 현)를 오간다.
규슈에키벤영업회가 취급하는 다양한 에키벤. 에키벤은 전국에 2500여 종이나 있는데 가격도 3000원부터 20만여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가운데 생선 한 마리가 놓인 것이 신야쓰시로역의 ’은어삼대’ 에키벤이다.
○ 일본 최고의 철도차창 비경을 찾아서
구마가와 거친 강의 수면에서 난반사돼 어둔 차안을 산란하게 비춘 아침햇살에 눈이 피로해질 즈음. 규슈횡단특급은 종착역 히토요시에 도착했다. 일본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타보고 싶어 하는 히사쓰센의 풍치구간 시작점이다. 절경을 보자면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 터. 산 너머 요시마쓰역(미야자키 현)까지 1시간 14분간의 열차여행은 그야말로 험준한 산악을 타고 넘는 거친 길이다. 역시 빨간색의 이사부로 신페이호가 동행한다. 험준함은 터널 20개와 스위치백(Switch back) 두 구간, 반경 300m의 루프(Loop)식 철도가 말해준다. 도중 두 역에 서고 두 곳의 경관 포인트에서 촬영과 감상을 위한 서비스 정차도 한다.
10시 6분. 열차가 출발했다. 이곳 해발고도는 106.6m. 히사쓰센 최고 지점인 야타케역(해발 536.9m)까지 50여 분간 수직고도 430m를 올라야 한다. 터널 5개를 통과하니 오코바역(294m). 첫 스위치백을 지나자 또아리 모양의 루프식 철도가 펼쳐진다. 다시 4개의 터널을 지나야 야타케역이다. 도중 두 번째 터널에서 열차가 멈췄다. 평야를 배경으로 펼쳐진 에비노고원의 산악풍광 때문이다. 야타케역에서는 5분간 정차. 증기기관차도 전시돼 있고 100년 전 지어 세월의 더께가 앉은 옛 목조역사도 그대로다.
터널 5개를 통과하자 마사키역(380m). 두 번째 스위치백 구간을 통과해 이 역에 정차했다. 역사 옆 철길에선 주민 십수 명이 일부러 나와 손을 흔들어주며 환영했다. 쪽방 모습의 작은 목조역사에서는 소박한 특산품도 팔았다. 플랫폼에선 댕그렁 종소리도 울렸다. ‘안전기원’ 종인데 주민들이 만들어둔 것이다. 이 역사는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이후 종착역 요시마쓰(213m)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다시 터널 다섯 개를 지나는데 세 번째 후로는 가고시마 땅이다.
○ 하야토노카제호에서 맛보는 규슈 최고의 에키벤
가레이가와역 마당에서 하야토노마치 주민들이 잠시 정차한 관광열차 하야토노 카제호에서 내린 관광객을 반기며 노새를 앞세워 춤을 추고 있다.
에키벤을 다 먹을 즈음 열차가 섰다. 이 에키벤의 고향, 가레이가와역이었다. 고색창연한 목재역사(등록유형문화재) 밖의 마당이 시끌벅적했다. 주민들이 나와 노새와 함께 춤을 추며 열차승객을 맞느라 벌인 춤판 때문이었다. 노새도 신이 나는지 방울소리를 울리며 껑충껑충 춤을 췄다. 단 5분간의 짧은 만남. 하지만 인상은 깊었다.
○ 사쿠라지마 섬과 이부스키 온천의 고장, 가고시마
옻칠한 듯 고급스럽고 중후함을 풍기는 관광열차 하야토노카제 외벽의 열차명패. ‘하야토’는 투박함이 상징인 옛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현 서부)의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가고시마주오역은 2004년 신칸센 개통과 더불어 개장한 신역사. 2층 ‘미야게 요코초’(상점가)는 가고시마 향토 맛을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장소다. 반도 지형의 가고시마에서 잡힌 신선한 생선을 갈아 만든 가고시마 명산 어묵이 상점별로 판매된다. 또 하나 특산물은 고구마. 고구마튀김부터 아이스크림까지 고구마 간식거리가 다양하게 나와 있었다.
시내 북쪽 이소의 해안에 자리 잡은 센간엔(仙巖園)은 사쓰마 번(에도막부 당시 가고시마 서부를 차지한 봉건영지)의 역사와 전통건축을 간직한 유적. 당시 권력자 시미즈 가(家)의 19대 번주가 1658년 지은 거대한 별장(5만 m²)으로 정원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건너 사쿠라지마 섬의 모습은 절경으로 이름났다. 입장료(정원 코스) 1500엔(말차와 과자 제공).
가고시마 남쪽의 이부스키는 온천모래찜질로 유명한 곳. 거기서도 온천료칸 ‘햐쿠수이칸’(白水館)은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회담 장소로 이용했던 이부스키의 명소. 거기서 하룻밤 묵으며 온천모래찜질(1000엔)도 해보았다. 맨몸에 유카타를 입은 채로 모래바닥에 누우면 직원이 모래를 퍼서 부어 온몸을 묻는다. 그러면 바닥의 지열로 인해 5분쯤 지나면 전신에서 땀이 솟는다. 찜질시간은 10∼15분. 샤워를 하고 대욕장에서 온천욕을 즐긴다. 로텐부로에서는 해돋이도 본다. 아침식사는 바이킹(뷔페식).
코레일 관광개발은 JR규슈와 공동기획으로 규슈철도를 이용하는 3박 4일 관광패키지를 98만 원에 판매한다. 부산 역에서 제트포일 비틀호(2시간 40분 소요)로 후쿠오카(하카다항)에 도착, 규슈 신칸센과 관광열차를 탑승한다. 출발은 27일과 4월 2,9,16,23,30일. 문의 1544-7755, www.korailtravel.com
▼함께 여행하며 에키벤 역사를 알려준 분은… ▼
JR규슈의 에키벤 콘테스트에서 최근 3년 연속 랭킹 1위에 오른 명품 에키벤 ‘햐쿠넨노타비모노가타리 가레이가와’(왼쪽). 번역출판 중인 일본만화 ’에키벤’ 1권. AK커뮤니케이션즈 제공
구마모토역에서 그는 ‘도노사마벤토’(1100엔)를 권했다. ‘영주님 도시락’이라고 번역되는 이 에키벤은 봉건시대 구마모토 번을 239년간 다스린 호소카와(細川) 가문이 주제다. 최근 ‘일본에게 일본을 묻다’는 대한항공 광고에 등장한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제79대·1993∼94년)가 이 가문의 18대 당주. 도시락엔 말고기와 겨자연근(연근을 겨자와 꿀, 된장을 섞어 만든 양념에 재워 튀긴 것) 같은 구마모토 특미가 담겼다. 말고기는 우엉볶음에 들어있다.
신칸센과 히사쓰센이 만나는 신야쓰시로역에서는 ‘은어삼대’(1100엔) 에키벤을 맛봤다. 이곳 은어전문식당 ‘아유야 산다이’가 2004년 3월 규슈신칸센 첫 개통에 맞춰 1년간 준비 끝에 내놓은 역작이다. 규슈 에키벤 콘테스트(JR규슈가 매년 개최)를 3연패한 ‘명품’급. ‘은어삼대’란 이름은 식당의 상호로 3대에 걸친 110년 역사를 담고 있다. 은어국물로 지은 영양밥 위에 간장양념을 한 은어단조림이 연근 계란말이 등과 함께 올려져 있다.
이사부로 신페이호로 갈아탄 히토요시역에는 특산품 밤을 주제로 한 ‘구리(栗)메시’(900엔)가 명물. 간장으로 살짝 간을 해 지은 흰쌀밥이 밤 모양의 통에 담겼다. 밥 위엔 찐밤 몇 개와 고기완자, 표고버섯 등이 얹혔다. 1965년 이래 46년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그때 JR규슈가 대안을 제시했다. 관광열차의 신규운행이었는데 그게 하야토노카제다. ‘하야토’는 지명이지만 동시에 ‘가고시마 남자’를 뜻하기도 한다. 하야토노카제를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이유를 알 만하다. 투박함이 멋스러웠던 옛 사쓰마 번 무사기풍의 또 다른 표출이다.
관광열차 취역이 결정되자 하야토노마치 주민도 팔을 걷어붙이고 마을 살리기에 나섰다. 고풍스러운 목조역사의 가레이가와역을 무대로 한 관광사업이 추진됐다. 역사 운영권도 인수해 잠시 서는 열차의 승객에게 에키벤을 팔기로 했다. 이 도시락은 그렇게 개발됐다.
에키벤은 도시락통이 특이하다. 대나무 수제품이다. 밥은 표고버섯과 죽순을 넣고 지었다. 반찬으론 고로케와 가네(가고시마 특산 붉은고구마 튀김), 스세(무 당근 식초절임)와 무말랭이조림, 미소덴가쿠(야채된장구이)가 전부. 역에서 보고 만난 산골마을 주민마냥 소박했다. 그런데도 사전 주문해야 맛볼 만큼 인기 짱이다. 올해까지 연속 3년 규슈 에키벤 랭킹 1위. 나도 일주일 전 주문해 이날 기차간에서 전달받아 맛봤다. 인기의 비결은 과연 뭘까. 대답 역시 소박했다. 누구나 그리워하는 엄마 손맛의 옛날 시골 밥상 맛이다.
종착역 가고시마주오역에는 가고시마를 대표할 다양한 에키벤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엔 공통점이 있었다. 가고시마 특산 흑돼지로 만든 ‘돈코쓰’(투박함이 상징인 가고시마 전통 요리로 삼겹살을 소주와 된장, 흑설탕으로 양념한 뒤 뼈째로 장시간 조린 것)라는 것. 나카하라 씨는 ‘돈코쓰’ 에키벤(950엔)을 샀다. 표고버섯 영양밥 옆에는 돈코쓰와 함께 난반즈케(튀김옷 없이 굽거나 튀긴 생선)와 쓰보즈케(말린 무 간장절임) 등 규슈 남부의 반찬이 담겨 있었다.
나카하라 씨와 헤어진 건 가고시마주오역. 그런데 내가 독자와 헤어지기 전에 고백할 게 하나 있다. 나카하라 씨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나의 에키벤 여행을 자극한 일본만화의 주인공이다. 이번 여행은 열 권짜리 ‘에키벤’의 1편(규슈)을 읽는 순간 기획됐다. ‘철도 도시락 여행기’라는 부제처럼 일본철도의 명물 에키벤을 철도이야기까지 곁들여 담아낸 책인데 전국의 명물 에키벤이 총망라됐다. 한글로도 번역됐고 현재 5권까지 출판(AK커뮤니케이션즈)됐다. 문의 www.amusementkorea.co.kr 02-702-7963
○ 에키벤 정보
▽종류
전국에 2500여 종, 규슈에키벤영업회 소속 17개사 것만도 200여 종. 매년 새로운 것을 개발한다.
▽에키벤 문화
‘여행과 에키벤은 동전의 양면’이란 게 일본인의 인식.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주전부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 일본에서도 열차간 에키벤 식사는 당연. 낮술도 같다. ‘차가워서 맛이 없는 음식을 상자에 구겨 넣고 먹는다.’고 흉보는 이탈리아인의 몰이해도 관용하는 분위기.
▽판매처
역과 주변의 전문점과 편의점, 일반상점, 기차간. 하카다역 구내 전문점은 ‘에키벤 스타디움’(www.jrkyushu.co.jp/ekiben). 가레이가와 에키벤은 사전 주문하면 하야토노카제로 배달해준다. 이틀 전까지 JR규슈의 각역 녹색창구와 여행센터, JR규슈여행지점에서 신청한다(교환권 발급). 가고시마주오∼하야토역 구간은 불가.
▽유효 기간
규슈에키벤영업회의 경우 7∼12시간. 심야에 배달받아 오후 10시까지만 판매. ◇가격: 260엔(약 3000원)짜리 오니기리(주먹밥) 벤토부터 1만5000엔(약 20만 원)짜리 마쓰자카규(특산 쇠고기) 벤토까지 다양.
○ 여행정보
◇JR규슈
▽홈피:www.jrkyushu.co.jp
▽규슈신칸센: 2004년 3월 1단계(신야쓰시로∼가고시마주오역)에 이어 12일 2단계(하카타∼신야쓰시로역)가 개통됨에 따라 7년 만에 전선 완전 개통. 이로써 혼슈와 시코쿠, 규슈를 잇는 일본 전국신칸센시스템(아오모리∼도쿄∼신오사카∼하카타∼가고시마·총연장 2300km)이 1964년 첫 신칸센 개통 후 47년 만에 완성됐다. kyushushinkansen.com
▽수고카(Sugoca): JR규슈가 발행하는 전자화폐. 후쿠오카 및 기타큐슈지역의 지정된 철도구간, 후쿠오카의 지하철과 니시테쓰(버스·전철)는 물론 지정상점에서 화폐처럼 사용. 승차권 대신 사용하며 자동발매기에서 팔고 충전도 가능.
▽JR하카타시티: 후쿠오카의 중앙역인 하카타역에 들어선 대규모 쇼핑몰 겸 식당가, 컨벤션시설. 규슈신칸센 완전 개통에 맞춰 대대적인 개보수공사 끝에 3월 3일 개관. 식당가 구르메애버뉴의 46개 레스토랑 중에는 지난해 미슐랭가이드에 오른 이탈리아, 프랑스식당도 있다. 후쿠오카에 처음 진출한 전국 체인 유명 식당도 29개. 680석 규모 공연장과 극장, 옥상공원도 있다. www.jrhakatacity.com
◇규슈
▽구마모토: 검색어 ‘좋아!좋아!구마모토시’(joajoa-kumamotocity.kr) 입력
▽가고시마 △관광연맹: www.kagoshima-kankou.com/kr △센간엔: www.senganen.jp
규슈=조성하 여행전문 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