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외교가 스캔들’의 주인공 덩 씨와 그가 주중 상하이 총영사관의 전 영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덩 씨의 결혼식 당시 모습과 H 전 영사, P 전 영사와 찍은 사진. 문건은 K 전 영사가 덩 씨의 협박에 못 이겨 썼다고 주장하는 각서. ☞ 사진 더 보기
○ 한국 외교가 초유의 ‘여성 스캔들’
지난해 11월 김정기 전 상하이 총영사는 외교통상부로 긴급 공문을 보냈다. ‘영사 2명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현지 근무가 어려운 상태이니 조기 귀국을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부에서 뒤늦게 현지의 진상을 파악한 결과 상하이 영사관에서 비자 담당 업무를 맡고 있던 H 전 영사는 중국 여성인 덩(鄧)모 씨(33)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덩 씨에게 ‘이중 비자’를 내주고 덩 씨 주변 사람들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급해준다는 소문이 교민 사회에 파다하게 퍼졌다. 또 K 전 영사는 덩 씨를 H 전 영사에게 빼앗긴 뒤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H 전 영사의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벽보 수십 장이 상하이 영사관 인근에 나붙기도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H, K 전 영사 모두 영사관에 남아 있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각자 한국의 소속 부처로 복귀시키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두 영사가 조기 귀국을 한 뒤 파장은 더욱 커졌다. 덩 씨가 H 전 영사뿐 아니라 K 전 영사, P 전 영사와도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온 것으로 의심되며 이 과정에서 영사관의 주요 자료까지 유출됐다는 제보가 올해 초 국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 등으로 접수된 것. 총리실 등이 확보한 증거자료에는 K 전 영사가 “나는 다시는 덩 씨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벌금으로 6억 원과 제 손가락 하나를 잘라 드리겠다”며 직접 자필로 작성하고 서명까지 한 각서도 포함돼 있다. P 전 영사가 덩 씨와 얼굴을 맞대는 등 서울 남산과 택시 안 등에서 친밀한 포즈로 찍은 사진도 발견됐다.
광고 로드중
○ 상하이판 ‘마타하리(?)’
이 사건에 연루됐거나 덩 씨를 알고 지냈던 상하이 영사관 출신 영사들은 하나같이 덩 씨가 상하이 시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덩 씨가 상하이 시 정부와 관련된 민원을 손쉽게 해결해 줬다는 것. 이 때문에 문제가 된 해당 영사들이 먼저 덩 씨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상하이 근무 당시 덩 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K 전 영사에게 덩 씨를 직접 소개했다는 한 전 영사는 “나도 2008년경 한 선배로부터 처음 그 여자를 소개받고 그 뒤로 가깝게 지냈다”며 “공무원인지 아닌지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덩 씨가 중국 공안 쪽으로 끈이 닿아 있었으며 그것도 굵은 동아줄이었다는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는 “해외에 나와 일은 해야 하는데 의지할 데가 없는 외교관들이 상하이 시 정부 쪽과 연결하고 싶은 욕심에 먼저 접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덩 씨를 알던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중국에는 정식 공무원 외에 비공식으로 활동하는 공산당원이 있는데 덩 씨도 이 중 한 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덩 씨 사건을 감찰한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그가 국가정보를 캐내는 스파이가 아니라면 정보를 사고파는 브로커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왜 접근했을까
일각에서는 덩 씨가 한국 영사들과 친분을 쌓은 뒤에는 적지 않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한국 비자 대행 이권을 노렸을 수 있다는 추정을 하고 있다. 덩 씨는 2009년 10월 상하이 한국대사관 비자 발급 대행 기관 중에 중국 J은행의 일부 부서를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비자를 받기 위해 ‘웃돈’까지 쓰는 중국인이 적지 않았다. 결국 ‘땅 짚고 헤엄치는’ 짭짤한 수입이 보장되던 사업권을 달라고 한 것.
광고 로드중
한 상하이 영사관 관계자는 “자신(덩 씨)과 H 전 영사가 ‘부적절한 관계’라는 교민 투서가 대사관으로 들어오고 점점 영사관 내 자신의 입지도 축소되자 덩 씨가 영사들에 대해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며 “당시까지만 해도 덩 씨의 영향력을 믿을 수밖에 없는 영사들이 꼼짝없이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각서를 썼던 K 전 영사는 “덩 씨가 불러주는 대로 각서를 쓰지 않으면 내 아이들을 죽이고 내가 중국에서 그릇된 행동을 해왔다고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며 “평소 미행과 도청으로 내 신상에 대해 샅샅이 모르는 바가 없는 덩 씨임을 잘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라는 대로 썼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K 전 영사와 함께 상하이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영사관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영사관에서 처음 사건을 조사했을 당시 K 전 영사가 덩 씨에게 꾸준히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연서도 전달하는 등 업무 이상의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며 “업무상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던 K 전 영사가 덩 씨에게 나아가 애정까지 느꼈던 게 아닌가 정황상 판단했다”고 전했다.
한편 덩 씨와 상하이에서 인연을 맺었던 영사관 관계자들은 아직도 덩 씨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며 덩 씨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조차 극도로 경계했다. 한 전직 상하이 영사는 “내가 베이징(北京)에서도 근무해 중국 사회에 대해 조금 아는데 중국에선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한국에 귀국한 이후에도 여전히 덩 씨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털어놨다.
광고 로드중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