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무혈 쿠데타… 현존 최장기 집권20차례 암살위협 넘겨… 한국에 우호적
카다피는 만 27세에 권력을 손에 넣었다. 1969년 대위였던 그는 11명의 청년장교들과 함께 무혈 쿠테타를 성공시켰다. 곧바로 혁명평의회를 구성해 스스로 의장에 올라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아랍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영국군과 미군이 철수하자 석유산업을 포함한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외국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1977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하고 인민 직접민주주의 구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 체제는 실상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기한 독재권력이었다.
2년 뒤인 1979년부터 그는 서방과의 관계단절을 통해 아랍권의 맹주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5년 12월 로마와 빈에서 동시에 발생한 폭탄 테러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1986년 3월 미국과 영국 연합군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대규모 보복 공습을 받았고 1988년에는 270명의 희생자를 낸 팬암기 폭파사건 개입 의혹으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됐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 자진 폐기 결정 때까지 오랜 고립기간을 지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 ‘대국민 연설’ 차남 사이프가 나선 까닭 ▼
‘친서방-개혁’ 이미지로 정국 수습 노려
그는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리비아 친서방화의 얼굴이자 개혁개방의 희망’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대표적인 친서방파이자 개혁파로 알려졌다. 현재는 공식 직함이 없지만 지난해까지 카다피국제자선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왜 사이프가 나섰을까. 워싱턴의 중동문제전문가 데이비드 스쳉커 씨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즐기는 카다피의 성향 때문”으로 분석했지만 또 다른 전문가는 “사이프가 갖고 있는 대내외적인 좋은 이미지를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풀이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