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예술가의 집이 개관함으로써 이제 예술인들이 마음껏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게 됐다.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집이라고 하면 예술가들의 집단창작실(아틀리에, 스튜디오),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아카데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이 모여 순수한 교류를 시도하는 공간(살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대학로 예술가의 집은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살롱으로서의 기능이 먼저 떠오르면서도, 예술가와 일반인을 위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아카데미로서의 기능도 일정 부분 담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술창작을 진작하는 교류의 기능도 포함하고 있다. 개관 당일 첫 행사로 ‘소통과 나눔을 위한 예술정책 대토론회’가 열린 이후 각종 예술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 가운데서 황병기 고은 김성녀 씨 등 예술계 명사들의 강연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상 매체를 통하는 것보다 명사를 직접 만나 강연을 듣는 것이 훨씬 감동적이다.
다른 장르 예술가끼리 교류 적어
장르별로 보면 국내에도 예술가의 집과 유사한 공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예술의 전 장르를 포괄하는 장소는 없었다. 예술가들은 자기 분야 중심으로 모였지 공존으로서의 유대감을 신장시킬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했다. 궁핍한 환경이었지만 1950, 60년대만 하더라도 장르를 초월한 예술가들의 모임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다른 장르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오늘보다 훨씬 높았다. 자기 분야 외에는 맹목인 오늘날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가운데 유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며, 예술의 순수한 공감대 위에 우리 문화의 전체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웃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이 자신의 영역에 어떤 감화와 영향을 미치는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닫고 있는 상태다. 어쩌면 우물 안 개구리 현상은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지도 모른다.
한류 열풍을 타고 우리의 대중예술이 동남아를 휩쓸고 있는 반면 우리의 순수예술은 아직도 그 모습을 제대로 내밀지 못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우수한 예술가들의 성과가 돋보이기도 하지만 순수예술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리기엔 아직도 미흡한 상태다.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가. 정책의 부재인가, 전략의 미숙인가. 창조적 역량을 고양하는 예술 상호간의 경쟁적 교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 시대 예술의 담론을 형성하는 역할의 부재가 우리 예술을 아직도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게 하는 원인은 아닐까.
발전방향 논의하는 사랑방 됐으면
여기서 예술가의 집의 시대적 역할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술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참다운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벌이는 난장토론, 예술가와 일반인이 만나 나누는 흥미로운 대화, 기성 예술가들이 예술지망생을 만나는 멘터링이 끊임없이 펼쳐져야 한다. 한편에선 작품 발표회가 열리고, 다른 한편에선 예술을 어떻게 지원하고 성과를 올릴까 하는 것을 논의하며 국제교류를 통해 우리 예술의 세계적 위상을 가다듬는 전략을 모색하면 어떨까.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고양하는 격조 높은 예술의 창조와 보급이다. 이를 실현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집은 예술의 전방에 있기에 그 역할이 직접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이점이 있다. 모든 영역 예술가들의 참여가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광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