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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존을 향해/1부]태초에 차별이 있었다…‘한글 디바이드’ 심각

입력 | 2011-01-04 03:00:00

86점 vs 75점 vs 69점… 서울 3개 초등학교 2학년 국어능력 평가해보니




■ 이런 현실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한글 창제의 취지를 밝힌 ‘어지(御旨)’의 마지막 구절. 모든 백성이 쉽게 문자를 익혀 풍요로운 삶을 누리길 바랐던 세종의 뜻이 집약돼 있다. 하지만 2011년 대한민국 초등학교 교실은 아직 세종의 어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부모의 경제력과 자녀에 대한 교육투자 능력의 차이가 자녀의 한글 능력 차이(한글 디바이드)를 심각한 수준으로 벌려 놓기 때문이다.

○ 공존의 장애물, 한글 디바이드


한글 디바이드는 국어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 등 다른 교과의 학습능력을 크게 좌우하는 요소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교육을 통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을 막으려면 공교육의 출발점인 초등학교에서의 한글 디바이드 좁히기는 공존의 필수조건이다.

한글 디바이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특별취재팀은 지난해 12월 21∼23일 서울시교육청의 협조를 받아 서울시내 3개 초등학교 2, 3학년생을 대상으로 언어력 검사(학년별 10∼12문항, 100점 만점)를 실시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의 차이가 자녀의 한글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하기 위해 서초구 A학교, 노원구 B학교, 금천구 C학교를 선정했다. 세 학교는 각각 중대형 평형 아파트 밀집 지역, 소형 임대 아파트 밀집 지역, 연립·다세대 밀집 지역에 위치해 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2학년의 평균점수는 A학교 86.7점, B학교 75.6점, C학교 69.7점이었다. 3학년도 A학교 72.7점, B학교 58.4점, C학교 58.0점으로 A학교가 다른 두 학교보다 월등히 높았다. 어휘력, 독해력, 사고력, 표현력 등 평가영역 전반에서 소득 수준이 높고 맞벌이 부모 비율이 낮은 지역에 사는 학생의 언어력이 높게 나타났다.

개별 답안지 분석에선 한글 디바이드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C학교의 한 3학년생은 ‘동화책’으로 시작하는 끝말잇기 문제의 답을 ‘구슬-지구-귀뚜라미’라고 적었다. 또 다른 3학년생은 ‘부모님에 대한 짧은 글을 쓰라’는 문제에 ‘지렁이’에 대한 글을 썼다. 문제 자체에 대한 독해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증거다. B학교의 한 2학년생은 그림을 일기로 재구성하는 문제에서 ‘그런데’는 ‘그러대’로 ‘빨리’는 ‘빠리’로, ‘그랬다’는 ‘그래다’라고 적은 답안을 제출했다. 받침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는 얘기다. 반면 A학교는 이처럼 읽기, 쓰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답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 “상급 학년 갈수록 격차 커질 것”

B, C학교는 A학교보다 학생들의 언어능력이 전반적으로 낮았을 뿐만 아니라 한글 부진아동의 비율도 월등히 높았다. 총점을 100∼71점(평균 이상 구간), 70∼41점(평균 이하 1구간), 40∼0점(평균 이하 2구간) 등 세 구간으로 나눠 학생 분포 비율을 비교했더니 A학교는 평균 이하 2구간 비율이 1.4%에 불과한 반면 B학교는 12.3%, C학교는 11.3%로 10배 가까이 높았다.

문항 출제와 결과 분석을 맡은 한솔교육 김수연 선임연구원은 “초등학교 저학년의 한글 능력은 사실상 부모가 대화나 독서, 놀이 등을 통해 자녀를 한글 사용 환경에 얼마나 많이 노출하고 자극을 줬는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어휘력, 사고력, 독해력, 표현력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한글 디바이드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누적돼 학력 격차로 이어질 소지가 많다는 점. 한 현직 초등학교 교사는 “교과 내용이 어려워지는 4학년이 될 때까지 한글 부진이 만회되지 않는 학생은 경험상 다른 교과목 학습에서도 부진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중장기적으로 현재의 한글 디바이드가 고등학교나 대학 등 상급 학교 진학에 필요한 비판적 사고력이나 표현능력의 격차로 이어질 수도 있다.

○ 한글 교육 어려워져 취약계층 부담

하지만 현재 초등학교의 한글 교육 여건은 과거보다 취약계층 자녀들에게 불리해졌다는 지적이 많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초등학교 교감은 “취학 전 한글을 깨친 아동 비율이 늘면서 입학 후 간단한 한글 자모 읽기, 쓰기 연습이 끝나면 바로 단어와 문장을 다룬다”며 “취학 전 한글을 못 깨친 학생은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저소득층 가정 아동 비율이 높은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복지투자학교’로 지정받아 방과후 활동 형태로 독서지도나 한글 보충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한글 지도에만 역량을 집중하는 학교도 드물고, 지원 대상에 들지 못한 학교는 이마저 운영하기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동네 살면 다 우리아이” 이웃형-언니가 가르친다

■ 이런 대안

지난해 12월 22일 경기 광명시 철산동에 위치한 ‘동네한바퀴 공부방’에서 지역 아동들과 공부방 교사로 활동하는 대학생 자원봉사모임 ‘다솜아띠’ 회원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함께 장식하고 있다. 광명=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아이 한 명이 자라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합니다.’

경기 광명시 철산4동. 가파른 언덕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다세대주택촌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동네한바퀴 공부방’ 벽면에 붙은 글귀다. 이곳에선 벌써 2년 넘게 매주 월∼금요일 저녁시간이면 광명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자원봉사동아리 ‘다솜아띠’(사랑하는 친구라는 뜻) 회원들이 지역 아동의 공부를 봐주고 있다. 공부방을 찾는 이는 주로 인근의 조손, 한부모, 맞벌이가정의 초등생 자녀들. 학교를 마쳐도 늦은 시간까지 집에서 홀로 지내야 해 인근 PC방이나 대형마트 시식코너 등을 기웃거리던 아동들이다.

○ 공부방은 제2의 집

숙제검사부터 직업탐색에 이르기까지 다솜아띠 회원들의 다양한 교육봉사 프로그램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한글교육이다. 국어 담당 유은혜 씨(20·국민대 국문학과)는 “생계에 바쁜 부모가 많아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받아쓰기에서 ‘ㅔ’와 ‘ㅐ’를 구분 못하는 아이가 많았다”며 “독서지도와 함께 낱말퍼즐, 받아쓰기 등 한글학습을 꾸준히 한 결과 아이들의 국어성적도 오르고 학교생활 전반에 자신감도 커졌다”고 말한다.

자원봉사가 아닌 어엿한 직업으로 소외계층 아동들의 한글 등 기초학력을 돌보는 이들도 있다. 경기 의정부시 가능2동 ‘나무들을 위한 숲’ 지역아동센터에서 ‘아동복지교사’로 근무하는 김부연 씨(37)가 그런 사례다.

아동복지교사란 빈곤층 아동에게 학습, 보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국 3400여 개 지역아동센터를 지원하기 위해 2008년부터 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제도. 일정 교육을 수료한 아동복지교사로 하여금 지역아동센터에서 아동들의 기초학력, 독서지도, 예체능활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 일자리’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김 씨는 2008년부터 이곳 센터에서 아동복지교사로 일하며 초등생의 기초학습을 책임지고 있다. 하루에 6시간씩 주5일을 근무하며 사교육은 꿈도 못 꾸는 아이들의 공부를 봐준다. 전공을 살려 틈틈이 독서지도와 한글학습을 병행한다는 김 씨는 “이 지역에는 부모의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워 초등학생 중에도 동화 ‘해님달님’을 못 읽어 본 경우가 수두룩하다”며 “급여는 연 1000만 원 남짓으로 많지 않아도 아이들의 공부도 돕고 전공지식과 경력도 활용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는 기존 복지교사의 고용안정성을 높여주고 채용 인원도 늘리면 더 많은 인재가 저소득층 아동 돌봄 서비스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 학교가 먼저 나서야

하지만 최고의 대안은 역시 학교 울타리 안에서 충분한 한글교육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초등학교 입학 후 한글교육 강화와 한글 부진아를 위한 보충학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한글 디바이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일부 지역교육청은 이미 대안 마련에 들어갔다.

이범 서울시교육청 교육감 보좌관은 “취학 전 한글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충분히 한글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시교육청 차원에서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정책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담당 학생의 한글능력에 대한 담임교사의 책임을 강화하고 한글능력이 부족해 학습이 부진한 학생을 가려낼 수 있는 검사와 진단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