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구 재동 상업건물 ‘딕타’의 건축철학
동쪽에서 바라본 입면. 따로 떼어놓고 보면 주변의 한옥과 불화를 일으킬 것 같은 부정형의 생김새다. 하지만 이 건물은 행인의 시선 속에서 혼자 튀지 않는다.
오랜 세월 모여 쌓인 한옥으로 이뤄진 길에 벌어진 틈새는 한옥으로 메우는 것이 안전하고 수월하다. 공간이 간직해 온 세월을 거스를 경우 받게 될 곱지 않은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간단한 변형이라도 덧붙이면 ‘미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칭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재동에 최근 문을 연 지상 2층, 지하 2층 규모의 주거 겸용 상업건물 ‘딕타(dicta)’는 그 쉽고 편한 길을 피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둘러싸고 도시한옥이 다닥다닥 붙은 역사문화미관지구. 골목 끝에 새로 앉은 건물은 한옥이 아니다. 그러나 땅이 품은 시간의 맥락을 무시하거나 거스르지 않았다.
“겸허하게 스며드는 듯한 몸가짐을 가진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나는 이웃과 조금 다르게 생겼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로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앉은 건물. 문화재 전문가, 관청, 건축주의 까다로운 견제와 요구사항을 ‘격언’으로 받아들여 공간을 다듬은 것이다.”
치렁치렁한 은회색 단발을 멋스럽게 늘어뜨린 김 대표는 얼핏 한옥 등의 전통 건축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건축가다. 차림새나 외모만이 아니라 그가 내놓은 일련의 건물들 역시 어딘지 모르게 서구적인 스타일을 보여 왔다. 김 대표는 설계작업에 거의 언제나 이번 ‘딕타’처럼 프로젝트 키워드를 부여했다. 경기 가평군의 주택 프로젝트에는 ‘lacuna(빈틈)’, 서울 송파구의 다세대주택에는 ‘inocula(접종체)’, 서초구에 지은 단독주택에는 개인의 기억과 종(種)의 기억을 합친 기억을 의미하는 ‘mneme’란 키워드를 붙였다.
촘촘히 붙어 앉은 한옥 사이에 한옥이 아닌 모양새로 앉아 길의 맥락을 거스르지 않는 일. 서울 종로구 재동에 새로 들어선 주거 겸용 상업건물 ‘딕타’는 땅에 주어진 제약을 디자인의 콘셉트로 끌어안아 활용한 사례다.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개인이 선택한 콘셉트를 지켜내면서 건물을 짓는 건축가는 별 소득 없이 큰 부담을 져야 한다. 한옥지구처럼 주변 공간의 맥락이 견고한 땅에서는 몇 배로 힘이 드는 선택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2005년 완공한 경주 양동마을 교회에서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올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전통마을에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형태의 교회를 만드는 계획. 채도 낮은 푸른 빛깔의 이 건물은 우려와 달리 이웃한 한옥의 처마 아래 풍경을 더 정갈하게 다듬어 주는 요소가 됐다. 어떤 경우에든 ‘독특하지만 겸허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그의 건축 태도가 유구한 전통마을에도 아무 탈 없이 스며든 것이다.
내부 계단 역시 ‘한옥 길’이라는 풍광에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틈새로 난 창밖 기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사진 제공 스튜디오 어싸일럼
건물 앞을 천천히 걸어보면 안다. ‘안이한 과거의 답습을 벗어나 한옥 길의 새로운 확장을 모색했다’는 둥의 뻔한 수식은, 부질없다. 이웃집 담과 마주한 디테일 하나하나에서 오밀조밀한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김 대표는 그 구석구석의 소리가 타인에게 이해받는지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 건축가다. 설계사무소 간판을 ‘정신병동’이란 뜻의 ‘asylum’으로 붙인 것도 ‘사회의 통념과 소통하는 데 수월하지 못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소’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힘들지 않냐고? 당연히 지친다. 소통에 재주가 없으니 일도 잘 안 들어온다. 하하. 그러나 소통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축은 예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관입(貫入·꿰뚫고 들어감)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업이다. 누가 새로운 건축을 추구했는지는 다음 세대가 평가할 일이다. 나는 내 건축으로 내가 생각하는 새로움을 ‘기록’할 따름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