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편에 편지 보내지만… 누가 고향으로 날아갈까”혜초의 그마음, 시공 넘어 우리곁에
인도 마하보디 대탑에 도착한 혜초의 모습을 상상해 디지털로 복원한 모습. 사진 제공 박진호 씨
왕 도사를 통하지 않고는 둔황 문서를 만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펠리오가 왕도사를 찾은 것이다. 펠리오에 앞서 이곳을 찾았던 러시아 탐험가에겐 석실의 존재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영국의 오렐 스타인에겐 석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게 했던 왕 도사였다. 그러나 펠리오의 유창한 중국어 앞에 왕도사는 무너지고 말았다. 왕 도사는 결국 석실 조사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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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중국 둔황 막고굴의 17굴 석실 입구.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펠리오는 왕 도사에게 흥정을 했다. 17호 석실 안에 있는 모든 문서를 팔라는 흥정이었다. 왕 도사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펠리오는 그를 끝없이 설득했고 결국 왕 도사는 펠리오에게 넘어갔다. 펠리오는 중요 문서 6000여 점을 선별해 500냥이라는 헐값으로 입수했다. 펠리오는 5월 30일 둔황을 떠나 10월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문서를 포장해 프랑스로 부쳤다. ‘왕오천축국전’은 곧바로 파리에 있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1909년 5월 펠리오는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다.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는 혜초가 신라 승려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실크로드와 ‘왕오천축국전’을 연구해온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단언한다. 혜초는 704년경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719년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밀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4년 뒤인 723년 열아홉 살 때 그는 인도로 구법(求法) 기행을 감행한다.
광저우를 출발해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지나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이어 쿠차와 둔황을 거쳐 727년 11월 당나라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에 돌아왔다. 장장 4년에 걸친 약 2만 km의 대장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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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은 발견 당시 앞 뒷부분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총 227행에 5893자. 세로 28.5cm, 가로 42cm 크기의 종이 아홉 장을 붙여 만들었다. 총길이는 358cm.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필사본에 대해선 혜초가 직접 썼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혜초의 원본을 보고 누군가 필사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오영선 학예연구사는 “어느 쪽인지 정확이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필사했을 경우 그 연대는 10세기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라고 보았다.
신라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와 서역 지방을 기행하고 727년 완성한 ‘왕오천축국전’. 앞뒤쪽 일부가 떨어져 나간상태다.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그의 여행 길은 실크로드를 관통했다. 혜초는 4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고향땅 경주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가 나오기도 한다. 먼 이국 땅에서 달 밝은 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계림(鷄林)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계림은 경주를 말한다. 이 시는 그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혜초는 이처럼 고국을 그리워했으나 당나라 땅 장안에서 밀교를 연구하다 780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이국 땅에서의 그의 죽음은 어쩌면 세계인으로서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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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