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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유윤종]협상에서 원칙이 빠질 때

입력 | 2010-11-29 03:00:00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사건이 이어지면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가 1938년 뮌헨협정이다. 독일의 히틀러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상이 체결한 이 협정은 독일이 체코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주데텐을 합병하도록 규정했다. 이 협정은 오늘날 ‘양보로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우는 데 인용된다. 그러나 이 협정이 가르치는 교훈은 또 하나 있다. ‘원칙이 없는 합의는 근사해 보여도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뮌헨협정 체결 과정에서 히틀러는 더는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체코 전체 합병에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도 주데텐 독일인들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합리적으로’ 물러선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이 근사한 협상에는 원칙이 결여됐다. 독일이 멈추도록 기대했을 뿐 어떤 원칙에 따라 멈추어야 할지에 대한 숙고도, 철학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독일은 이듬해 체코 전체를 보호령으로 병합했고, 이는 ‘폴란드를 침공해도 연합국이 제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판단으로 이어져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최근 기자의 책상에 도착한 인상 깊은 책으로 ‘고려 실용외교의 중심 서희’(서해문집)가 있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이 쓴 ‘서희의 협상 리더십’ 장은 서희의 외교술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협상상대였던 거란의 소손녕도 ‘상대방의 화술에 눌려 땅을 내준 얼빠진 외교관’이 아닌, 현실감각과 협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소손녕은 고려 공격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했다. ‘고려가 (거란 연고지인)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핵심조건(송나라를 섬기지 말 것)과 함께 협상할 수 있는 부가조건(영토문제)을 제시해 상대가 핵심조건을 수용할 길을 열어놓았다. 결과적으로 거란은 ‘고려와의 통교’라는, 고려는 ‘영토문제 해결’이라는 분명한 수확을 얻었다. 미봉책이 자리 잡을 틈은 없었다.

최근 KBS 이사회가 의결한 수신료 인상안의 협상과정을 위 사례들과 비교해본다. 6월 처음 이사회에 상정된 안은 광고를 전면 폐지하고 수신료를 현행 2500원에서 6500원으로 올리는 안, 2TV의 광고를 20% 축소하고 수신료를 4600원으로 올리는 안 등 두 가지였다. 이후 야당 추천 이사들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협상 과정에서 ‘광고 축소’는 흐지부지됐다. 여당 추천 이사들마저 광고 현행 유지를 기정사실화한 채 양측이 인상폭만 놓고 줄다리기를 벌인 것이다. ‘공영방송이 광고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구조조정 노력 없이 공영성 제고에 시청자의 부담만 요구할 수 있는가’ 같은 근본 철학과 원칙은 일찌감치 휘발되어버렸다.

이후 KBS가 수신료 인상의 명분으로 밝힌 이유도 설득력이 없다. 일례로 디지털 플랫폼 ‘코리아뷰’를 구축하는 데 수백억 원을 투입하겠다는데, 이는 현행 지상파에 할당된 주파수를 쪼개 다채널 방송을 하겠다는 것으로 방통위의 승인조차 받지 못한 ‘구상’일 뿐이다.

원칙과 철학이 없는 합의는 담합이다. 하물며 전국 수천만 이해당사자들의 의사와도 동떨어진 담합은 야합이다. 광고와 수신료를 조정할 이유라는 근본적인 ‘철학’에서 출발해 시청자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국민의 자산인 지상파 주파수를 이용해 지난주 내내 틀어댄 홍보광고 정도로는 시청자가 이해해주지 않는다.

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