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속 낭만보다 고시촌 닮아
성균관 유생의 모습은 드라마에 비친 모습 그대로일까. 드라마는 남장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만큼 묘한 사랑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면서 매우 발랄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조선시대 성균관은 그처럼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과거의 1차 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생진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들어와 관리로 나아가는 최종 관문인 문과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드라마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치열한 고시 경쟁이 기다리는 살벌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국대전’에는 성균관 입학생의 자격이 규정되어 있다. 과거 1차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자, 서울의 사학(四學) 생도 중 15세 이상 소학 및 사서와 오경 중 1경에 통한 자를 성균관에서 수학하게 했다. 특별 전형도 있었다.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로서 ‘소학’에 통한 자나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를 일부 선발했다. 생원이나 진사로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은 상재생(上齋生), 나머지 입학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여 거처에 차별을 뒀다. 유생의 정원은 건국 초에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 200명으로 늘었다.
‘신래희(新來戱)’라는 신고식도 있었다. 먼저 들어온 유생이 신입을 골탕 먹이는 의식이었지만 성균관 생활에 빨리 적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와 서재에 거주했다. 학생회에 해당하는 재회(齋會)가 있었고 학생회장인 장의(掌議)를 뽑았다. 유생은 음식과 학용품 등 생활용품을 지급받는 국비 유학생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유교 경전과 ‘근사록’ ‘성리대전’ ‘경국대전’ ‘통감’ 등 과거 시험 과목과 문장력을 기르는 공부를 주로 했다.
식당서 300끼를 먹어야 초시 응시
현재의 쪽지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일강(日講) 순과(旬課) 월강(月講)은 유생을 긴장하게 했다. 시험 성적은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4단계로 나누었고 성적에 따라 특전과 벌칙이 이어졌다. 출석도 중시했다. 약방(藥房)에 단 북을 한 번 치면 잠을 깨고, 두 번 치면 세수, 세 번 치면 식당에 갔다. 군대 생활을 연상시킨다.
성균관 졸업은 문과 시험의 합격을 의미했다. 식년시의 경우 3년마다 한 번 시험을 치니까 실패하면 3년을 기다려야 했다. 왕이 성균관을 방문해 문묘에 참배할 때 치는 시험인 알성시나 제주도에서 올라온 감귤을 하사받을 때 실시하는 황감제(黃柑製) 등 특별 시험도 있었으나 선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16세기의 개혁파 학자 조광조는 중종이 성균관을 방문했을 때 실시한 알성시에서 눈에 확 띄는 답안을 제출하여 초고속 승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유생을 격려하는 왕의 조처도 이어졌다. 1743년 영조는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 대사례(大射禮)를 성균관에서 실시했다. 영조는 당쟁의 종식을 선언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탕평비를 성균관에 세웠다. 역대 왕세자의 입학식도 성균관에서 있었다. 성균관에 원자학궁(元子學宮)을 지었으며 왕세자가 8세가 되면 입학시켜 성균관의 위상을 높였다.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일은 유생의 최고 목표였다. 과학화 정보화의 수준만 다를 뿐이지 그들의 고민과 꿈 또한 오늘날 대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문을 최고 이념으로 삼고 유생을 최고의 인재로 삼으려는 왕조의 의지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학문과 문화국가로 자리를 잡게 했다. 그 중심에 성균관이 있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