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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나를 찾아주고 세상을 구한 집

입력 | 2010-09-18 03:00:00

◇백가기행/조용헌 지음/280쪽·1만8000원/디자인하우스




경남 진주시 지수면 허씨 집안 고택. 본채 4칸, 사랑채 5칸으로 만석꾼의 집으로는 소박하지만 손님을 접대하느라 부엌에 매일 쇠다리가 걸려 있을 정도로 인심이 후했다.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집 기행을 떠났다. 집다운 집을 찾기 위해서다. 근대에 신분제도가 없어지면서 돈이 신분을 가늠하는 기준이 됐다. ‘나, 돈 있다’라는 외부적 표시는 처음에는 시계였다. 롤렉스는 부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흘러 롤렉스는 자동차로 바뀌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것도 안 통한다. 덩치 큰 벤츠가 길에 많다. 이제 어느 지역, 어떤 집에 사느냐가 신분을 가늠하는 척도다. 죽기 살기로 돈을 모아 집을 사는 현대인들은 집의 노예가 됐다. 이런 욕망의 기름기를 뺀 집들이 어디 없을까. 집과 집안사람, 집의 문화를 저자의 풍부한 지식으로 풀어냈다.》
‘어느 좌파의 운동구호보다 충격적인….’ 저자는 전남 장성군 축령산 자락 도공 김형규 씨의 5m²(한 평 반)짜리 집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사람이 다리 쭉 뻗고 두 팔 벌리고 누워 있기에 적당한 크기다.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나오는 호숫가 오두막을 연상시킨다.

이 오두막의 건축 비용은 2만8000원.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사회적 집’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존재의 집’이다. 서까래용 나무는 인근의 허물어진 헌 집에서, 지붕은 주변에서 채취한 띠(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여러해살이 풀)와 억새, 볏짚으로 엮었다. 집에는 전기가 없다. 어른 손바닥 두 개 크기만 한 봉창(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살피는 창문)으로 달빛을 받고 촛불을 켤 뿐이다. 방이 작으면 물건에 대한 욕망도 없어진다. 방 안 살림은 앉은뱅이책상과 찻주전자, 다호(茶壺·차를 우려내는 그릇)가 전부다. 저자는 이 집을 “공간이 작아 오히려 생각이 커지고, 자신의 내면과 진지하게 마주하는 집”이라고 평가한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시인 박남준 씨의 3칸 오두막도 같은 맥락이다. 주역에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遁世無悶·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고, 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번민하지 않는다)’이란 말이 있지만 ‘독립’과 ‘둔세’는 어렵다. 저자가 보기에 박 시인은 독립한 사람이다. 결혼도 안 했고 자식도 없다. 그렇다고 스님도 아니다. 한 달 생활비는 30만 원. 여기저기서 나오는 원고료 수입이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반찬은 자급자족하고 인근에서 농사짓는 후배들이 쌀을 준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박남준 시인의 3칸 오두막.

악양은 치유의 땅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양지바르고 먹을 것이 풍부한 명당이다. 악양은 전체 인구가 4000명 정도인데, 이 중 스님이 150명이다. 많을 때는 300명이었다. 귀농인도 100가구 정도 된다. 악양은 낭인들의 천국이다.

부잣집도 소개했다. 부자에는 졸부(猝富) 명부(名富) 의부(義富)가 있는데, 경북 경주시 교동 최 부잣집은 ‘명부’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지만 이 집은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다. 동학혁명 등 각종 사회적 변란을 겪으면서도 가문을 유지했던 비결은 부와 함께 대를 물린 원칙 덕택이다.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주변 100리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에 논 사지 마라’ 등이 그 원칙이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 최 부잣집의 사랑채 마루가 무너졌다. 서로 배급을 타려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이다. 한때 집은 집터 6600m²(2000평), 후원 3만3000m²(1만 평), 99칸이었다. 상주하던 노비가 100여 명, 1년에 과객 접대에 쌀 1000석을 소비했다. 현재 이 집은 영남대 소유다. 최씨 집안은 대학에 집과 모든 토지를 기부했다. 저자는 “최 부잣집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서 하나의 기념비적 전통”이라고 말했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 허씨 집안은 ‘의부’라고 할 만하다. 500년 전 이곳에 정착한 허씨 집안은 조선 말기 허준대에 이르러 만석꾼이 됐다. 허씨 집안은 최익현의 의병 자금을 대고, 흉년이 들면 구휼하고, 장학금에 돈을 썼다. 허준의 둘째 아들 허만정이 1920년에 지은 집이 현재 이 고택이다. 본채 4칸, 사랑채 5칸으로 만석꾼의 집으로는 소박하다. 허만정은 독립운동단체인 백산상회에 거금을 기부했고,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인 ‘형평사 운동’에 돈을 댔다. 광복 직후 마을 청년들이 친일한 이장을 죽창으로 살해하려 하자 그가 길을 막았다. 청년들도 항일에 앞장선 어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6·25전쟁 중 좌우익 간 살육전을 막은 것도 그였다. 허창수 GS그룹 회장과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이 이 집안의 후손이다.

부산 해운대 옆 달맞이고개에 있는 다실(茶室) 이기정(二旗亭)은 도심의 명소다. 저자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집에 다실, 중정(中庭·실내 정원), 구들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정에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도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구들장은 신경과 근육의 피로를 풀어준다. 다실은 가내구원(家內救援)을 받기 위해 필요하다. 차를 마시면 의식주가 바뀐다. 채식을 하고 과식을 피하며 담백한 먹을거리를 좋아하게 된다. 복장도 간소해진다. 실내 인테리어도 바뀐다. 소파 벽걸이TV 침대도 없어진다. 저자는 “다실은 혁명”이라고 말한다. 간결한 인테리어의 이기정은 한국적인 다실의 모범이다.

풍류와 실용이 가득한 충남 논산시 명재 고택, 계곡 물소리가 번뇌를 씻어주는 전남 해남군 대흥사 앞 유선여관, 자연을 살린 명원(名園)을 품은 경남 하동군 조씨 고택 등도 저자가 소개하는 백가(百家)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