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철수 영희’ 대본 ★★★★ 연기 ★★★☆ 연출 ★★★
옥탑방에 갇힌 스물아홉 청춘남녀의 애환을 국어책에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의 이야기로 풀어낸 연극 ‘철수 영희’.사진 제공 극단 가족
열병과 같은 청춘의 한복판을 통과하고 서른을 코앞에 둔 그들에게 인생은 소주처럼 쓰고 담배같이 메마르다. 영희(김민조)는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주말엔 생면부지 사람들의 결혼식 하객 ‘알바’까지 뛰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다. 사랑했던 남자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뒤 기별도 없고, 아버지와 사별한 어머니(장설하)는 재혼한 뒤에도 영희에게 손 내밀기 일쑤다.
철수(윤돈선)의 삶은 더 서글프다. 영화감독의 꿈을 이룰 제작비를 마련한다고 주식에 손댔다가 전세금마저 날리고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백수로 변두리 옥탑방까지 밀려온 패잔병 신세다. 게다가 시골 사시는 부모님께 생활비까지 타 써야 하는 처지다. 그것도 평생 한량으로 살다가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으며 아들 반찬 심부름을 하는 아버지(이승준) 손에 쥐여진 돈봉투로.
옥탑방에 갇힌 스물아홉 청춘남녀의 애환을 밀도 있게 그리면서도 어설픈 낭만을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연극의 미덕이다. 옛 애인에게 “바른생활 교과서처럼 너무 빤하게 잘 읽혀서 도무지 밑줄 그을 만한 구석이 없다”는 말을 듣는 철수. 어린 시절 친아버지가 사줬던 바나나 맛의 대용품으로 ‘바나나킥’을 혀끝으로 녹여 먹는 영희. ‘서른이 된다는 건, 서른 이후의 삶도 별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란 씁쓸한 현실에 눈떠가는 그들에게 같은 옥탑방을 무대로 한 연극 ‘옥탑방 고양이’와 같은 낭만은 사치다.
하지만 그들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스스로의 윤리적 결단을 통해 ‘운명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터득한다. 그들이 결코 닮고 싶어 하지 않음에도 운명적으로 닮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굴곡진 삶을 수용하는 것.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던질 줄 아는 것. 그리고 국어교과서 속에서 철수가 영희에게 던지는 불멸의 대사, ‘영희야 놀자’에 의미심장한 여운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최초 호명한 원로 국어학자 박창해 선생(14일 작고)도 가슴 아파하면서 한편으론 흐뭇해할, 그런 연극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 원. 8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름다운극장. 02-94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