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667명 송환… 조선 최고 대일 외교관“위험지역 마다않고 찾아자국인 보호위해 맹활약오늘날 외교관들의 표상”
외교 소식통은 20일 “외교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인터넷 투표 결과 등을 놓고 16일 회의를 열어 이예를 두 번째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했다”며 “올해 그를 재조명하는 각종 연구 활동과 심포지엄 등을 통해 오늘날 한국을 이끌어 갈 외교인의 상(像)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예는 중인(아전) 출신으로 일본과의 교섭에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동지중추원사라는 종2품 벼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아들 이종실도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풍랑으로 순직했다.
이예는 1400년 대마도 부근의 일기도를 방문해 왜구의 침범을 막는 약속을 얻어냈다. 이때부터 대일 교섭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거나 대마도 등에 사절로 가 조선인 포로 667명의 송환을 성사시켰다.
그는 오늘날의 비자 격인 ‘문인(文引)’제도를 확립하기도 했다. 태종의 왜구 정벌 이후 왜구의 침략은 줄었지만 일본인 왕래가 늘어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대마도주에게 ‘문인’ 발급권을 인정함으로써 수를 제한했다. 이 제도는 강력한 왜인통제책으로 활용됐고 이를 규정하는 계해조약(1443)이 체결되기도 했다.
조선 초기 조정이 일본 국왕과 대마도 등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모두 65차례였다. 이예는 43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통해 40여 차례에 걸쳐 일본에 갔고 이 중 7회는 정사 혹은 부사 자격이었다. 당시 일본 3회 파견자가 2명, 2회 파견자가 1명, 1회 파견자가 25명인 것과 비교하면 그가 조선 초기 대일외교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치가 잘 드러난다. 그는 통신사 활동을 통해 대장경 및 불경을 일본에 전파하고 일본에서 재배되던 사탕수수를 국내에 보급하기도 했다.
외교 소식통은 “전문 외교관으로 험지를 마다 않고 찾아가 자국인을 보호한 이예의 활동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험지에서 활동하는 지금의 우리 외교관들이 본받을 표상”이라고 말했다. 이예는 2005년 2월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