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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방콕 매춘의 거리서 ‘우리’를 보다

입력 | 2010-05-22 03:00:00

◇새벽의 나나/박형서 지음/406쪽·1만1500원·문학과지성사

동시대인들의 비루한 삶의 풍경
먼 타국으로 확장 세밀하게 그려




태국 방콕 나나역 인근의 매춘 거리를 소설의 무대로 삼은 소설가 박형서 씨는 이국의 풍경과 그 거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포착해냈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이 소설은 이국의 어느 거리에 관한 이야기다. 이곳이 아닌, 어느 다른 곳. 하지만 지구의 다른 편에서 우리와 중력을 함께 나누며 사는 이들이 있는 곳. 태국의 방콕 나나역 인근의 매춘 거리가 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방인에게는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여행지의 소란스러운 풍경일 뿐이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매일 꾸려가야 하는 삶의 현장이다. 작가는 소이 식스틴이라는 이곳 매춘 거리의 풍경을 세밀화처럼 펼치면서 무덥고 생경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명 ‘나나’의 초입에는 축축하게 젖은 행상인들이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매춘부들 틈에서 목탄에 구운 바나나와 닭날개 꼬치와 계란을 풀어 넣은 볶음국수와 물방개 튀김 따위를 팔았다. 행상 패거리들이 늘어선 길 안쪽으로는 무리하게 스피커 볼륨을 높인 선술집이 오십여 미터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며…세 시간 단위로 숙박비를 받는 중저가 호텔들로 끝 모르게 이어졌다.”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여섯의 한국인 청년 레오는 아프리카로 가는 여행길에서 태국을 경유한다. 그곳에서 한 여인 플로이를 만나면서 여행 일정이 흐트러진다. 그는 그녀가 지내는 공동주택가에서 몇 달 머문다. 플로이는 소이 식스틴 거리의 매춘녀들을 아우르는 실세다. 그가 플로이에게 끌린 것은 아름다운 외모뿐만이 아니라 레오에게 얼핏얼핏 스치는 어떤 영상 때문이다. 레오는 사람들의 전생을 볼 줄 안다. 그녀를 만났을 때 덮친 윤회의 환상을 보고 그가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오백 년을 넘어 다시 마주치게 됐다는 사실이다.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에게 몸을 파는 매춘부이자, 그런 삶을 철옹성처럼 단단히 지켜나가려고 하는 그녀는 어수룩한 레오가 말하는 ‘사랑’ 따위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맴돌면서 상처를 입히고, 일정한 거리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상태 그대로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플로이와 함께 살고 있는 제각각의 기구한 사연을 가진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냄새나는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면서도 이곳을 떠날 희망을 거의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매춘부들, 거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부패 경찰관들, 레오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들. 거리의 소외된 이들의 삶을 가로지르면서 시간이 흐른다. 소이 식스틴도 변해가고, 몇 번 이 거리를 다시 찾게 되는 한국남자 레오도 나이가 든다.

소설은 동시대인들의 비루한 삶의 풍경을 세밀한 취재를 토대로 먼 타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러면서 이것이 그저 지나치고 말 어느 여행지, 우리와는 무관한 먼 공동체의 이야기가 아님을 되새겨보게끔 한다. “오늘 여기서 맡은 배역이 다를 뿐이다. 우리 중에서 매춘부로 살아보지 않는 자는 한 명도 없는 것이다”라고.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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