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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네덜란드… 자원 참전한 용사들

입력 | 2010-04-26 03:00:00

“Killed or captured…” 2개중대로 중공군 4개연대 격퇴




목숨걸고 지킨 325고지
지형도 모르고 전선 투입
중공군 나팔소리에 소름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네덜란드 첫 6·25박물관
“자유수호한 전쟁 잊지말자”
낡은 철모-식판-훈장 등
전우들 유품모아 21일 개관



《“Killed or captured but you take that hill(죽든, 포로로 잡히든 고지를 사수하라)!” 1951년 2월 15일 강원 원주 인근의 네덜란드 대대에 긴급명령이 하달됐다.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엄명이 내려진 곳은 325고지. 레인더르트 슈뢰더르스 중위(86·예비역 육군 대령)가 지휘하는 중대는 이곳을 놓고 중공군과 벌이는 처절한 전투에 투입됐다. 미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배속돼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당시 극도의 패배감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불과 3일 전 횡성에서 한국군으로 위장한 중공군이 한밤중에 침투해 대대장인 M P 오우던 중령이 전사한 뒤 대대 지휘부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다.》

325고지는 횡성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중심 도로에 있었다. 고지를 사수하지 못하면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막아낼 길이 없었다. 슈뢰더르스 중대를 포함해 3개 중대가 325고지에 배수진을 쳤다. 병력은 사실상 2개 중대 수준이었다. 중공군에선 4개 연대가 밀려들었다.

“솔직히 우리는 지형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소. 더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함과 강인한 정신력만 있었지. 죽기 살기로 지키겠다는 각오가 가장 큰 무기였어.”

네덜란드 대대는 참혹한 전투 끝에 325고지를 지켜냈다. 슈뢰더르스 씨는 “당시 중부전선 전세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325고지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었다. “네덜란드에 ‘어리석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속담이 있지. 내가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 “잊혀져선 안 되는 전쟁”

6·25전쟁 이후 오랫동안 네덜란드에서 참전용사들의 희생은 잊혀졌다. 네덜란드 파병 대대가 소속됐던 판 하우츠 연대에서 6·25전쟁 박물관 개관을 준비하던 판 에베이크 원사(45)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전쟁은 잊고 싶은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파병 병력 5282명 전원이 징집이 아니라 자원해 6·25전쟁에 참전했던 만큼 참전용사들에게 무관심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참전용사 요제프 미할스키 씨(83)는 “네덜란드로 돌아올 때 환영식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는 가족에게도 전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장인 슈뢰더르스 씨를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40년 전부터 네덜란드군이 6·25전쟁에 바친 희생을 기억할 박물관 개관을 꿈꿔왔다.

참전용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유족들이 판 하우츠 연대에 기증하는 유물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슈뢰더르스 씨 등 참전용사 4명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6·25전쟁 60주년인 올해 개관이 가능해졌다.

○ 60년 가까이 트라우마로 남은 중공군

네덜란드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13일 스하르스베르헌 시에 있는 판 하우츠 연대 내 6·25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중공군 모양 마네킹을 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마네킹의 전투복과 무기는 전쟁 당시 노획한 것이다. 이 박물관은 21일 정식 개관했다. 앞줄 왼쪽부터 참전용사 스하위테마커르, 베임스터르, 스미트 씨.

암스테르담에서 100여 km 떨어진 스하르스베르헌의 판 하우츠 연대에는 21일 최초의 네덜란드 6·25전쟁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슈뢰더르스 씨 등 박물관 개관에 기여도가 큰 참전용사 4명의 노력을 기리는 축포 4발이 연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개관을 1주일여 앞둔 13일 참전용사들이 박물관을 미리 찾았다. 박물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표창 깃발과 훈장, 낡은 식판, 노획한 북한군 모자와 노동당 당증, 네덜란드 병사가 공부하던 한국어 교본 등으로 가득했다. 네덜란드 대대가 마지막 전투를 치른 강원 철원군 김화읍의 340고지에서 발견된 철모와 화약통도 있었다.

참전용사들이 중공군 전투복과 장비를 입힌 마네킹 앞에 섰다. 할 말을 잊은 듯 한참 뚫어져라 응시했다. 침묵의 시간 끝에 기자가 “‘중공군’을 다시 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N 베임스터르 씨(82)는 “60년이 지난 일이다. 당신 심리학자냐”며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극도로 기억하기 싫은 상대와 마주친 인상이었다. 중공군은 여전히 심신의 트라우마(외상·外傷)로 남아 있었다.

C 스미트 씨(80)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저들을 무조건 쏴야 했어. 중공군들은 사계절 언제나 저 복장으로 우리를 괴롭혔지.” 중공군의 낡은 나팔을 발견하자 스미트 씨는 “중공군이 밀려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중공군들이 스미트 씨의 등 뒤에 총구를 겨눴다. 1953년 3월 경기 연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미트 씨는 엎드린 채 중공군을 향해 정신없이 사격하고 있었다. 갑자기 1m 후방에서 중공군이 나타나 그의 등과 왼쪽 무릎, 엉덩이에 3발을 쐈다. 스미트 씨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후송돼 사경을 헤맸다. 2주간 치료를 받은 뒤 상태가 호전됐다.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전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천사가 돌봤다”고 회고했다.

○ “우리가 죽어도 박물관은 남을 것”

베임스터르 씨는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감격한 표정이었다. “다른 어떤 나라도 이렇게 박물관을 잘 꾸민 나라가 없을 거야.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만들어져서 참 다행이오.” 스하위테마커르 씨는 기자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에베이크 원사가 “네덜란드법에 박물관은 1주일에 최소 2일 이상을 개방하게 돼 있다. 일반인에게도 박물관을 공개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참전용사들이 도슨트(전시 설명 안내인)를 자청했다. 에베이크 원사는 “참전용사들이 떠나도 박물관은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배들의 한국전 참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네덜란드군의 선구자”라며 “1950년에 내가 군인이었다면 당연히 한국에 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클라스 스하위테마커르 씨(82)가 헤어지는 기자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 앰 해피(I am happy)….”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한국어선 옮겨타 암호무전에 답신… 오폭막아” ▼
■ 해군 통신병 모차헌 씨


6·25전쟁에 파병된 네덜란드 군함 판 할런의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모차헌 씨가 당시 미국 신문에 게재된 판 할런 승조원들의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 해운 강국인 네덜란드는 6·25전쟁에 군함 6척을 파병했다. 1951년 4월 해군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CP 모차헌 씨(81)도 군함 ‘판 할런’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현재 참전용사협회 총무를 맡고 있는 그는 “파병기간 1년 동안 한국 땅에 내린 적은 없지만 서해에서 한국인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군 군함들은 레이더에 잡힌 선박에 암호화된 전신을 보내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했다. 1분 안에 암호에 맞는 답신이 없을 경우 바로 발포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생계를 위해 바다에 나온 한국 어선들은 이런 통신을 몰라 미 군함의 발포로 침몰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 때문에 통신병인 모차헌 씨는 한국 어선에 옮겨 탄 뒤 새벽까지 아군 군함의 전신 신호를 받아 어선이 한국 배임을 알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밤마다 헬기를 타고 한국 어선에 옮겨 타 수행하는 일은 여간 고되지 않았다. 1분 안에 답신하지 못하면 모차헌 씨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전투와 다른 방식으로 한국인들의 목숨을 보호했던 일이었지. 암호가 매일 바뀌어 두꺼운 암호책을 숙지하는 일이 힘들었어. 긴장 속에서도 한밤중에 주판 사용법을 가르쳐주려 하던 한국인이 생각나는군.”

판 할런을 포함한 네덜란드 군함 3척은 1952년 원산항 봉쇄작전에도 참가했다. 군함 3척이 120도 간격으로 배치돼 원을 그리며 교대로 150mm 주포를 3일간 발사했다. 네덜란드 해군으로선 처음으로 전투기가 상공을 비행하며 표적을 지정한 뒤 군함이 포를 쏘는 ‘에어슈팅’ 전술을 시도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판 할런에서 먹은 건조한 음식 탓에 젊은 나이에 이가 상해 틀니를 해야 했다. 그런데도 지금 그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판 할런의 사진이 깔려 있다. 그는 “판 할런을 볼 때마다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었다는 자부심이 든다”고 말했다.

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아! 수원 삼일중학교…▼
전방투입前 묵은 추억의 장소
전우들 회비걷어 매년 장학금


슈뢰더르스 씨가 6·25전쟁 때 인연을 맺은 경기 수원시 삼일공고 건물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 10월 한국에 들어온 네덜란드 파병 대대는 본격적인 전투에 투입되기 전인 그해 12월 4일 경기 수원시 삼일중학교(현 삼일공고)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이곳에서 22일까지 먹고 자며 적응 훈련과 미군 제2사단에 배속될 준비를 마쳤다.

당시 중대장이던 레인더르트 슈뢰더르스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장에게 삼일중 건물은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낸 평화로운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85년 한국을 찾은 슈뢰더르스 씨는 깜짝 놀랐다. 당시 삼일공고 교장으로부터 자신들이 머물렀던 건물이 재건축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슈뢰더르스 씨는 대뜸 “그것은 내 건물이오!”라고 소리쳤다. “전쟁 중 제대로 된 침실에서 잔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지. 삼일중 건물은 내게 6·25전쟁을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란 말이오.”

슈뢰더르스 씨는 그 길로 담당 공무원을 만나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설득했고 결국 건물을 보존하기로 결정됐다고 한다.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은 추억을 간직해준 학교에 감사의 표시를 잊지 않았다.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는 1989년부터 매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2, 3명의 삼일공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매년 장학금 총액은 약 3000유로(약 440만 원).

슈뢰더르스 씨는 여기에 매년 졸업하는 장학생에게 사비를 들여 100달러씩 추가로 주고 있다. 참전용사협회는 회원들의 회비(회원당 14유로), 참전용사 가족의 장례식 때마다 설치하는 ‘삼일공고 학생을 위한 장학금 모금함’을 통해 십시일반 장학금을 마련해 오고 있다.

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동영상 = 6.25전쟁의 상처…폐허로 남은 옛 북한 노동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