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었다. 도쿄의 속살 같은 우에노 공원. 몇 년 전 가을, 세미나 참석차 도쿄에 갔다가 짬을 내서 그 공원 한편에 위치한 일본 국립박물관을 들렀다. 그곳에 칼이 있었다. 베네딕트가 말한 사무라이의 칼, 센고쿠(戰國)시대를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칼, 태평양 군도의 열사와 밀림에서 ‘옥쇄한’ 병사들의 칼, 가미카제 조종사가 마음에 품고 미시마 유키오가 배를 갈랐을 그 칼이었다. 조금의 더함도 덜함도 없이 사람을 베는 용도에 충실한 푸른 날의 닛폰도(日本刀)를 마주하며 우리가 과연 이 칼을 넘어설 수 있을까 몸서리쳤다.
그 기분은 서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할 때 느끼던 자괴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런던 템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장중한 의사당과 그것이 상징하는 원형적 의회민주주의, 자유와 지성이 샹송처럼 흐르던 샹젤리제, 그 길을 유유히 걷다 보면 위용을 드러내는 개선문, 그리고 이 모든 게 시작된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고색창연한 유적들까지. 자유, 인권, 국가, 신성, 인문의 가치들을 물화(物化)시킨 이 문화적 자산들은 비록 제국적 침탈이 가져다준 본원적 축적의 결실이었을망정, 시간의 누적 속에 찬란한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들이 눈부신 만큼, 이러한 축적의 경험이 없는 우리가 같은 반열의 선진국을 꿈꾸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망연해지곤 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중원을 넘어 서북 서남 동북 지역을 아우르며 국가를 통합하고, 방대한 국토와 인력의 잠재력을 끌어 모아 인류사에 유례없는 초대(超大) 자본주의로 치달을 때 우리가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오성홍기가 휘날리던 베이징 톈안먼 광장, 상혼의 열기로 펄펄 끓던 상하이 난징둥루(南京東路)에서 엄습하는 한기에 몸을 떨던 이유였다.
이들에 비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나. 삼천리 화려강산? 작은 반도, 그것도 반 토막 난 산하, 수천만의 인구가 비좁게 디디고 선 이 땅이 너무도 소중한 우리의 터전임에 틀림없으나 과연 세계에 내세울 만한 자산이라 할 수 있나.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 대륙과 대양을 잇는 브리지로서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리다 급기야 국권을 상실하고, 한 민족끼리 60년째 총부리를 겨눠온 이 역사를 유구하다 할지언정 찬란하다 할 수 있는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인력? 세계화시대에 시대착오적 순혈종족 우월주의도 유분수지 싶다. 우리 역시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한데 섞여 엎치락뒤치락 살아가는 여느 사회의 하나일 터이다. 위로 소모적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부터, 삶의 주변에서 흔히 부닥치는 거친 성정의 사람들이며 버릇없는 아이들까지 “세계 제일”이라 지칭하긴 분명 무리다.
좁은 소견에 아무리 돌아봐도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우리의 모습이었다. 초일류 선진국가의 벽은 높디높고 우리가 가진 건 너무 작았다. 그러기에 국민소득 2만 달러 언저리가 우리의 정점이려니, 여기까지 온 것만도 다행이려니 했다.
하지만 이제 필자는 생각을 고치려 한다. 우리에게도 칼이 있었다. 온몸의 에너지로 폭발하듯 빙판을 질주하던 스케이트 날이 그 표상(表象)이었다. 그것은 전쟁과 살생이 아닌 평화와 상생의 칼이었다. 그 역동적인 칼 동작을 우리 젊은이들이 극한까지 밀고 갔을 때 우리 작은 땅도 함께 활짝 펼쳐졌다. 어디 그뿐인가.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우리에게 숨 막히는 문화자산이 있었음에야.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연기, 그 완미(完美)한 동작과 표현들 속엔 더도 덜도 아닌 오천년 세월, 삼천리 굽이굽이에 켜켜이 쌓여온 정과 한의 미학이 스며있었다. 너무도 고와서 끝내 서러운 우리의 춤사위였다. 감동이 그리도 컸던 이유일 것이다.
작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나라
하지만 더는 그 어떤 자격지심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워크숍 참석차 찾은 제주 중문, 그 청정한 새벽 바닷가엔 유채꽃이 만발해 있었다. 온천지가 꽃밭이었다. 그 사이를 걸으며, 수려한 이 산하, 작은 돌 하나에도 사연이 깃든 이 역사, 넘치는 에너지를 종종 주체 못하지만 근본이 선량한 이 국민의 일원임을 다시 한 번 감사했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