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위탁-재고 실시간 관리… 경쟁력 키워‘레드오션’ PC시장 생존 위해몸집 줄이고 노트북에 다걸기유연한 기업 문화도 한몫
에이서는 지난해 3분기(7∼9월) 델과 레노버 등 세계적인 PC 제조업체를 제치고 HP에 이어 세계 2위의 PC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이 회사는 유연하고 작은 조직을 만들어 덩치가 10배가 넘는 기업들과 경쟁한다.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에이서 본사 제품 전시실. 사진 제공 에이서
유럽에서는 1위, 미국은 3위, 중국은 5위…. 매 분기 공신력 있는 시장조사회사의 새 데이터가 나올 때마다 바뀌는 일종의 ‘순위 현황판’이다. 모든 지역에서 1위를 하자는 뜻이다. 한국에는 아직 낯선 이름인 이 회사는 지난해 3분기(7∼9월) 세계 2위의 개인용컴퓨터(PC)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1위는 HP였다. 한때 세계 1위였던 델과 레노버(옛 IBM PC사업부)의 순위는 에이서 아래였다.
○ ‘델 신화’를 구식으로 만들다
광고 로드중
TI가 사업을 접을 정도로 PC 시장은 1990년대 이후 계속 ‘레드오션’이었다. 2005년에는 PC의 대명사였던 IBM도 PC 사업부를 중국 레노버에 팔아버릴 정도였다. 이런 시장에서 당시 성공한 회사는 델뿐이었다. 델은 전화와 인터넷으로만 컴퓨터를 팔았고, 동남아에 공장을 짓는 등 생산원가를 크게 낮췄다.
하지만 이런 시장에 새 강자가 등장했다. 그게 에이서였다. HP와 델 등 경쟁사보다 크게 뒤지지 않는 품질에 값은 더 쌌으니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서는 2002년까지 모든 생산시설을 분사해 몸집을 줄였다. 대만은 그동안 ‘세계의 PC 공장’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핵심 역량인 생산시설을 없앤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PC 생산은 분사한 자회사나 중국의 위탁생산업체에 맡겼다. 어차피 PC 제조 기술이 발달해 어디서 만들든 품질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본사는 디자인과 설계, 브랜드 홍보에 주력했다.
공급망관리(SCM)를 통해 세계 곳곳의 판매 및 재고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이를 개발한 품질관리 담당 임원 토니 홍 씨는 “2004년에 HP가 우리 시스템을 보고 깜짝 놀라 참고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광고 로드중
판매도 외부 유통업체에 의존했다. 밥 센 에이서 동북아시아 총괄사장은 “에이서는 유통과 생산 모두 협력업체를 전적으로 믿고 맡긴다”며 “이렇게 조직의 군살을 뺀 덕분에 생산원가 이외의 비용이 경쟁사보다 훨씬 낮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이런 에이서를 가리켜 ‘PC 제조업체라기보다는 무역회사’라고 표현했다.
○ 색다른 조직 문화
에이서의 직원은 대만 본사에 1300여 명, 해외지사를 모두 합해도 약 7000명에 불과하다. 반면 경쟁업체인 델의 직원은 7만5000명이 넘고, HP의 PC 관련 사업부 직원도 10만 명이다.
광고 로드중
○ 에이서의 위험요소
에이서의 가격 경쟁력은 낮은 마진 덕분이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에이서가 제품 1대에 책정하는 마진은 2%대 후반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HP와 델은 마진이 4% 이상이다.
IDC 아태지역본부의 브라이언 마 수석연구원은 “경쟁사들은 에이서의 두려울 정도로 낮은 마진 정책 때문에 손해를 볼까 봐 결국 경쟁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시장 환경의 변화다. 경제위기 때는 에이서의 이런 공격적인 정책이 경쟁사를 압도하고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었지만 경기가 회복되면 기업 PC 시장이 살아난다. 마 연구원은 “기업용 PC 판매가 늘어나면 HP와 델의 매출과 이익이 늘어날 것”이라며 “일반 소비자 시장에 치중한 에이서가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느냐, 경쟁업체들이 기업 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것이냐의 대결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