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를 일본 중앙정부에서 발행하지 않고 지방에서 한 것은 아마도 우리의 국민감정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우리에게는 천추에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원수이지만 저들에게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도자요, 영웅일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쾌하게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분명 우리의 영웅이다. 그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대부호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사냥을 즐겨 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가무도 즐기고 호방한 모습을 보이면서 성장했다. 일본의 강압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 및 7개조의 이른바 한일신협약 체결과 군대 해산을 보고 망해가는 조국을 뒤로 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안 의사의 투쟁 뒤 열강의 언론은 일본의 한국침략 야욕을 규탄했고 일본의 만주침략 야욕에 분노하던 중국인의 가슴에는 항일의 불이 붙었다. 중국인들은 “우리의 원수를 (안중근이) 대신 갚아 주었다”며 기뻐했다. 중국의 국부 쑨원 선생은 “(안중근의)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닐지라도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며 칭송했다.
많은 중국인이 안중근을 소재로 한 시와 소설과 연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톈진 난카이(南開)대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연출하는 연극에 그의 부인이 남장하고 안중근 역을 맡아 출연하기도 했다. 중국인의 열광 정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들은 우리 항일투사에게서 자극을 받으며 한국인과의 유대감을 보였다.
더욱이 안 의사가 수감 중에,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당당한 태도와 항변, 논리 정연한 동양평화론 피력은 일본인 간수와 관리마저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다.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일본인 재판장에게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라며 비웃고 항소도 하지 않았다.
이에 놀란 일본 정부는 법원장을 안 의사에게 보내 항소하도록 권유했지만 오히려 그는 “옳은 일을 한 것이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그의 어머니도 안 의사의 두 동생을 보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미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일렀다. 일본과 여러 나라의 언론도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며 놀라워했다.
민병돈 경민대 석좌교수 전 육사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