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소송에서 오늘날의 피고는 척(隻)으로 불렸다.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도록 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척지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19세기 말 관아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두 사람은 법에 따라 판결해달라는 시송(始訟)다짐 뒤 삷등(白等)을 했다. 삷등은 최초 진술을 뜻하는 옛말로 한자는 이두식으로 음차한 것이다. 이지도는 다물사리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 소유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 자손들도 자기 집안의 (사)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양천제(良賤制)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도 노비가 되기 때문이다. 다물사리는 노비 남편과 결혼했지만 양인 신분을 지녔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경우 부인이 양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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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관(訟官) 김성일은 증거조사에 들어갔다. 호적을 조사해 양인을 자기 노비라고 호적에 올리는 암록(暗錄)이 아닌지, 이와 반대로 피고가 역(役)을 피하기 위해 세력가나 기관에 몸을 맡기는 투탁(投託)을 하지는 않았는지 따졌다. 조사 결과 다물사리는 자손을 관노비로 바꾸려고 사위와 공모해 성균관에 투탁한 것으로 드러났다. 송관은 다물사리의 딸과 그의 소생들을 이지도의 어머니 서씨 부인에게 사노비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숭실대 법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다물사리와 이지도의 소송을 대표적인 예로 들어 조선의 사법제도와 노비제를 밝힌다. 저자는 “대충 일을 처리할 때 ‘원님 재판하듯 한다’는 말을 쓰지만 조선의 재판은 법과 제도에 따라 감탄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고 말한다.
19세기 말 관아에서의 소송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가 김윤보의 ‘행정도첩’에 실려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소송 당사자와 일정한 관계가 있는 법관은 재판에서 배제하는 오늘날의 제척(除斥)처럼 당시에도 상피(相避)가 있었으며 승소자는 소송비용으로 노비 관련 소송의 경우 백지 책 3권, 기와집과 논밭은 2권, 초가집은 1권을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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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