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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감동의 비빔밥’… 내용 진부해도 난 ‘울고 싶어라’

입력 | 2010-02-02 03:00:00


영화 ‘하모니’. 사진 제공 CJ엔터테인먼트

김윤진 주연의 영화 ‘하모니’를 보다가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내용이 너무도 진부해서 놀랐고, 두 번째는 이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해서 놀랐다.

사실 진부하단 게 뭔가. 상투적이란 게 뭔가. 장르적이란 게 뭔가. 나쁘게 말하면 ‘어디서 만나본 것 같다’는 뜻이고, 좋게 말하면 ‘대중의 감성이 반응하는 검증된 내용이나 형식’이란 뜻이다. 하모니를 보면서 스스로 무척 궁금해졌다. 나처럼 ‘싸가지’ 없고 피가 차가운 자가 왜 이 영화에 눈물을 흘렸을까 하고. 지금부터 하모니가 내 눈물샘을 자극한 지극히 감성적 요인들을 다분히 이성적으로 파헤쳐보겠다.

일단, 이 영화는 감동의 비빔밥이다. 감동적이란 소릴 들은 기존 영화들의 설정은 죄다 모아 놨다. 여죄수들이 마음을 모아 합창단을 이룬다는 큰 이야기 줄기는 ‘시스터 액트’고, 형무소에서 낳은 아들과 헤어져야 하는 애끓는 모정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이며, 반목했던 가족과 화해하고 자아를 찾는단 설정은 ‘러브 액추얼리’이고, 사형수가 결국엔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단 내용은 ‘데드맨 워킹’이다. 특히 대학생 동아리모임보다 더 화기애애하고 정감 있게 묘사되는 감방 내의 모습은 ‘쇼생크 탈출’을 넘어,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판도라 행성 뺨칠 만큼 비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문제는 이런 진부한 설정들을 어떻게 풀어내느냐는 방법론이다. 하모니는 관객을 먼저 안심시킨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남편의 폭력에 대항하다가(김윤진), 바람피우는 남편에 대해 울분을 표출하다가(나문희), 의붓아버지의 성폭행에 저항하다가(강예원) 의도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고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된 인물들. 이들은 폭력적 남성중심사회의 희생자일 뿐 본디 지극히 선한 사람들이란 설정이다. 그래서 관객은 ‘내가 저런 범죄자에게 동정심을 가져도 될까?’ 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 이들 주요 인물에 몰입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된다. 알고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은 나(관객)보다 더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이란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는 앞서 말한 진부한 설정들을 마치 RPG(Role-Playing Game의 약자로 게임 이용자가 역할수행을 하면서 한 단계씩 심화되는 게임)처럼 배열한단 점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제목처럼 ‘하모니’를 이뤄 합창에 성공한 뒤(1단계·미션 완수를 통해 김윤진은 ‘특박’이란 목표를 달성한다), 다시 외부 합창대회에 나가 성공해야 한다(2단계·미션 완수를 통해 반목하던 가족과 만나 화해한다는 목표가 달성된다). 그럼 여기서 눈물은 끝인가? 아니다. 지휘자 역할을 맡았던 사형수(나문희)가 사형장으로 불려가는 장면을 배치해 눈물의 융단폭격을 하는 마무리.

숨 가쁘게 영화가 달려가다 보니 영화는 캐릭터들을 깊게 구축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지만, ‘악독한 인물이 갑자기 심경을 바꿔 착해지는’ 논리적 비약과 개연성의 부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객이 스토리 전개에 뭔가 의문을 제기하려고 치면, 그 순간 여지없이 등장인물들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마구 울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하모니를 비꼬는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대책 없이 눈물을 밀어붙이고 휴머니즘을 무차별 살포하는 영화가 좋다. 이런 영화가 또 나오면 난 또 실컷 울어줄 것이다. ‘유치한 눈물’이라고? 그럼 ‘철학적인 눈물’은 무엇이냔 말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동영상 = 영화 ‘하모니’ 예고편  

▲ 직격인터뷰 = 김윤진 “한국-미국 오가며 활동해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