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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긴박했던 조선의 운명]②무력으로 점철된 국권 탈취

입력 | 2010-01-19 03:00:00

“광복하라, 내 혼백이 도우리라” 순종의 절규 울리는듯
■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되돌아본 을사늑약 현장
이토, 군사로 둘러싼채 대신 위협 국권 강탈
고종, 헤이그에 특사 보내 세계에 不法 알려
순종, 운명전 “조칙에 인준 안했노라” 유언




 1905년 11월 17일 오후 6시 반경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기 위해 대관정(지금의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 맞은편)을 출발해 덕수궁 중명전으로 향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특사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마차에 앉은 왼쪽과 오른쪽 사람). 이 사진은 1934년 경성부(서울시)가 발행한 ‘경성부사’에 실려 있다.

《1895년 10월 8일 왕비시해사건(을미사변) 후 건청궁(경복궁 내 왕의 처소)의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갇혀 지내야 했다. 달포가 지난 무렵, 왕을 구출하려는 친위 쿠데타가 있었지만 정보 누설로 친일 정권에 일망타진됐다. 왕비시해 소문이 퍼져 의병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수비대 병력 다수가 의병 진압을 위해 지방으로 가면서 왕궁에 대한 감시가 약화된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태자를 데리고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왕이 궁을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그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총리 김홍집과 농상공부 협판 정병하를 거리에서 때려 죽였다. 고종은 자기도 모르게 내려졌던 폐비(廢妃) 조칙을 철회하고 법부대신에게 시해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 러일전쟁 유리해지자 국권 빼앗아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바꾸었다. 청국이 패전으로 물러나고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한발 물러선 상황은 대한제국에 국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였다. 청국과 일본의 방해로 그동안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던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북한지역의 광산 개발, 철도노선 조사 및 착공, 서울 도시개조사업 등 굵직한 공사가 내외자본을 동원해 시작됐다. 군사적으로는 영세중립국 승인에 필요한 3만 명의 국방력 양성을 목표로 시위대가 1개 여단(1만3000명) 규모로 육성됐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1904년 2월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약 110만 명의 병력을 4개 군으로 나누어 투입했다. 제일 먼저 투입한 제1군은 한반도를 작전지역으로 했는데 그중 1개 사단은 한국 주차군(駐箚軍)이란 이름으로 아예 서울을 주둔지로 했다. 지배권 확보 과정에서 예상되는 한국의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군사기지 사용권을 얻기 위해 2월 23일자로 ‘의정서’가 먼저 제시됐다. 이 조약으로 주차군은 용산 일대에 기지를 마련했다.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현 웨스틴조선호텔 대각선 맞은편에 있던 대관정(大觀亭·대한제국의 영빈관)에 상주하면서 5분 거리에 있는 경운궁(덕수궁)의 고종황제를 감시, 위협했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 옆 골목길 안쪽에 있는 중명전. 최근 이곳을 찾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00여 년 전 이토 히로부미가 헌병을 이끌고 퇴궐하려던 대신들을 막은 채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며 “강제병합 자체는 무력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일본 정부는 전세가 유리해질 때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하나씩 빼앗았다. 뤼순(旅順) 총공격이 시작된 직후인 8월 22일에 ‘제1차 일한협약’을 강요해 한국정부에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투입함으로써 목을 조였다. 이듬해 5월 발틱함대 격파로 전쟁이 사실상 종료되고 9월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정부는 이를 배경으로 11월 17일자로 ‘제2차 일한협약(을사늑약)’을 준비했고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를 처리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이 과정은 군사력에 의한 국권 탈취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 헌병으로 대신 위협 강제로 조약

1905년 11월 15일 오후 3시 반, 고종황제는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일명 수옥헌)에서 특사 이토의 알현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말 서울 중구 정동극장 옆 골목길 안쪽의 중명전을 찾았을 때 중명전은 곳곳이 뜯겨 있었다. 복원공사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과 황실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했다.

이토는 이른바 ‘보호조약’ 체결의 뜻을 담은 일왕의 친서를 내놓았다. 무려 3시간 동안 설전이 오갔다. 황제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면 대한제국은 아프리카의 한 토후국과 같은 처지가 된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이토는 나중에 일왕에게 올리는 복명서에서 “고종황제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대세라고 판단해 대신들에게 협상을 지시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보고서의 초안이 최근 발견됐는데, 고종이 시종 반대했다는 내용은 삭제되고 고쳐 쓰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만큼 대한제국의 저항이 거셌다는 의미다.

이토는 1905년 11월 16일 한국 대신들을 모아놓고 일본의 뜻을 일방적으로 전하고 17일에는 하야시 겐조(林權助) 공사가 나서 강행하도록 했다. 하야시 공사는 한국 대신들의 반대를 끝내 꺾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넘어 대관정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토 특사에게 직접 나서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하세가와 사령관과 함께 마차를 타고 주차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제의 처소로 왔다. 중명전의 좁은 길목과 뜰은 일본 헌병들과 관계자들로 꽉 찼다. 이토는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붙들어 신문조로 찬반을 물었다. 찬성자는 2명뿐이었지만 이토는 이를 뒤집어 6 대 2의 다수 찬성이라 하곤 한국 외부대신의 관인을 가져와 찍게 했다. 외교권을 이렇게 군사력으로 위협하여 강제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일본 공사관에서는 자축연이 열렸다. 누군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가 당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해냈다”고 외쳤다. 이토는 귀국 길에 시모노세키에서 한 수행원을 하기(萩·현재 야마구치 현 중부에 있는 도시)로 보내 정한론을 주창한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무덤 앞에서 참배 보고를 올리도록 했다. 메이지 일본이 근대화에 앞섰기 때문에 한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배경 설명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다.

○ 고종의 친서외교와 순종의 유조

고종황제는 늑약이 어떻게 강제되었는지를 독일 등 수교국 원수들에게 알리는 친서외교를 펼쳤다. 고종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투쟁하자 이를 빌미로 일제는 퇴위를 강요했다. 황제의 퇴위는 의병의 봉기를 격화시킴으로써 이토의 입지도 좁게 만들어 1909년 6월에 마침내 통감에서 물러나야 했다. 사임 후, 군부 측이 추진하는 만주 진출에도 일조하기 위해 중국 하얼빈(哈爾濱)으로 갔다가 거기서 10월 26일에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총탄에 쓰러졌다.

국권 탈취의 최종 순서인 병합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주도했다. 국제사회를 의식해 최소한의 조약 형식을 갖추려던 이토의 뒤에서 항상 압력을 가하던 군부 실세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는 ‘한국병합 준비위원회’가 마련해준 관련 문건들을 들고 1910년 7월 하순 통감으로 부임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데라우치가 건네준 전권 위임장을 들고 순종황제 앞에 섰다.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창덕궁과 고종이 있던 경운궁 등 서울 곳곳에는 2600여 명의 일본군이 무장을 한 채 지키고 있었다. 황제는 이를 놓고 2시간 이상 무언의 시위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하고 그 위에 국새를 찍었다. 이완용은 이것을 들고 남산 아래 통감 관저로 가 데라우치와 마주 앉아 조약문에 서명 날인했다.

마지막 남은 절차는 병합을 알리는 칙유에 순종황제의 서명을 받는 것이었다. 이 칙유는 일본 측이 비준서로 준비한 것이지만 순종황제는 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황제는 1926년 운명하기 직전에 자신은 나라를 내주는 조칙을 인준하지 않았다고 유언했다. 그는 온 백성들에게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나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는 절규로 유언을 맺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 순종황제의 유조(遺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 1926년 7월 28일자에 실린 순종 황제의 유조(遺詔). 신한민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끌던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이다. 한문으로 된 유조를 한글로 번역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순종 황제는 전권위임장에는 할 수 없이 서명날인을 했지만 비준서에 해당하는 병합 공포 조칙에는 서명날인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破棄)하기
위하여 조칙(詔勅)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일본을 가리킴)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幽閉)하고 나를
협제(脅制·위협하고 견제함)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古今)에 어찌 이런 도리(道理)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유수(幽囚·잡아 가둠)에 곤(困)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이 위중하여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지금 나, 경(卿)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中外)에 선포하여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경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讓國·나라를 내 줌)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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