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의 대립, 이익의 대립
MB는 수도분할에 따른 행정 비효율을 문제 삼아 세종시 수정론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GH) 전 한나라당 대표는 신뢰의 문제로 맞섰다. ‘이익(효율) 대 원칙(신뢰)’의 대립구도에서 이익은 원칙을 이길 재간이 없다. 이 때문에 MB도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명분으로 갈아탔다. 이제 책임 대 신뢰, 즉 명분 대 명분의 구도가 된 것이다.
하지만 환원의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상대의 체면부터 살려줘야 한다. 그래야 대화와 협상이 가능하다. 강영진 성균관대 교수(갈등해결학)는 저서 ‘갈등해결의 지혜’에서 “쓰레기매립장 등 국내의 님비분쟁 실태를 조사한 결과 시골주민들이 행정당국에 장기간 맞서 싸운 근본 이유는 환경위험이나 보상액수가 아니라 자존심 손상, 공정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촌로들은 일방적으로 매립장 용지를 선정·통보했다는 점, ‘우리를 얕보아 그런다’는 느낌에 화가 난 것이다.
세종시 논란에서도 핵심은 충청의 자존심이다. 이 인화성 물질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원안과 수정안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2차적 문제가 돼 버렸다. 정부는 연기·공주 주민과의 대화로 첫 수를 뒀어야 했다. 마음이 상한 후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 비록 늦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충청인들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는 1월 초 수정안을 제시할 방침이지만 이 제안이 수용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내용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절차이며 경로다.
‘가는 데까지 가보고 정 안 되면 회군하자’는 생각이 아니라면 △대표성이 충분하고 △합리적이며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지역대표들을 선발해 민관합동위의 대안도출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
충청권 ‘출신’이 아니라 ‘지역 대표’가 의사결정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야 주민들이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일방적인 설득은 불가능한 상황임을 정부도 받아들여야 한다. 총리가 몇 번을 내려가도 안 된다. 충청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면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GH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국회에서의 해결은 무망하다.
가장 좋은 경로는 충청이 주도적으로 대의(大義)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논의가 행정효율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부족하다. 통일한국의 수도, 국가의 먼 미래에 대한 담론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먼저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라. 이익 문제로의 환원, 그에 따른 타협 등은 그 다음이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