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친해진 뒤 독서도 글쓰기도 개념이해도 술술∼”국가공인 2급… 3급… 어른 뺨치는 초등생 한자도사들
《“선생님, 눈이 아플 땐 왜 그냥 ‘병원’이 아니라 ‘안과’에 가나요?”
“선생님, 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나요? 사기는 범죄 아닌가요?”
수업시간에 이런 식의 엉뚱한 질문을 던져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초등학생이 적지 않다. ‘분수(分數)’ ‘소화(消火)’처럼 한자어로 된 개념이 많이 등장하는 수학, 과학 수업시간은 아예 한자어 뜻풀이 시간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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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학생들의 문제는 뭘까. 바로 ‘한자(漢字)’다.》
올해 3월 국가공인 2급(상용한자 및 인명 지명용 한자 포함 총 2355자) 한자능력급수증을 딴 경기 고양시 용현초등학교 3학년 김지혁 군. 5세 때부터 매일 10∼15자의 한자를 꾸준히 익힌 김 군은 현재 평균 97점 이상의 성적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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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국가공인 준3급(상용한자 1500자) 한자시험을 통과한 광주 장덕초등학교 6학년 김여진 양은 예습을 할 때 단원명에 포함된 한자어로 학습내용을 유추한다. 사회의 ‘우리 생활과 정치’란 단원을 예습할 땐 ‘정치’라는 한자어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일→대통령, 국회의원의 역할→민주주의, 선거’식으로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 그런 다음 교과서 본문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내용을 예측했나를 살펴본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학교수업을 들으면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고 김 양은 말했다.
김 양이 한자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건 ‘나만의 사전’을 만들어 활용한 덕분이다. 김 양은 매주 책이나 신문의 사설을 읽고, 새로운 어휘가 나올 때마다 옥편을 찾아 단어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다. 이렇게 익힌 어휘는 단어장에 한글과 한자어, 뜻과 음을 모두 적고 수시로 본다.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김 양은 중간·기말고사 국어시험에선 늘 100점을 맞는다.
김미화 서울 선정고등학교 한문교사는 “한자로 개념이나 용어의 뜻을 유추하다보면 사고력은 물론 교과전반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진다”면서 “한자를 알면 의미를 잘못 파악하거나 다른 개념과 헷갈려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학습효율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넘어가지 않으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때 ‘학습장애’를 겪을 가능성도 있다. 책을 줄줄 읽고도 정작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는 학습장애는 ‘어휘력 결손’이 문제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자녀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학부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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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는 김 군에게 가장 먼저 사람 ’인(人)’, 새 ‘을(乙)’ 같은 부수를 익히게 했다. 부수를 알면 한자의 뜻과 음을 예상할 수 있어 좀 더 쉽게 한자를 익힐 수 있기 때문. 김 군이 어느 정도 한자를 익힌 후엔 어휘력을 쌓기 위해 모양이 비슷한 한자, 의미가 같은 한자,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한자를 함께 묶어 공부하도록 했다.
박 씨는 “어휘력을 쌓으면 ‘병을 치료하는 사람’인 ‘의사(醫師)’와 ‘생각’을 뜻하는 ‘의사(意思)’처럼 동음이의어를 잘못 이해해 동문서답을 하거나 문제에 포함된 단어의 뜻을 몰라 답을 적지 못하는 문제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평균 98점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김 군의 별명은 ‘걸어 다니는 사전’이다. 2월 국가공인 한자 2급 시험을 통과한 김 군은 친구들이 과학교과서에 나오는 ‘수압(水壓)’의 뜻을 물으면 즉각 “물이 누르는 힘”이라고 답한다. 윤홍길의 ‘장마’, 정관용의 ‘꺼삐딴리’, 박완서의 ‘자전거 도둑’처럼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작품도 막힘없이 읽는다.
김 군은 “한자어, 고사성어를 꾸준히 익힌 덕분에 독서와 글쓰기 실력이 쌓인 것 같다”면서 “학교시험도 한문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