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0분. 김영삼(YS)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전격 발표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아들 현철 씨였다. 당시는 김영삼 정권 초. 현철 씨가 말 그대로 ‘소통령’이던 때였지만 그 역시 실명제 발표에는 ‘물을 먹었다’.
그가 물 먹은 사실은 YS 정권 말인 1998년 2월 드러났다. 검찰 조사 결과 현철 씨가 실명제 실시 직후인 1993년 10월 국가안전기획부 계좌를 이용해 대선 때 쓰고 남은 비자금 50억 원을 변칙으로 실명 전환하려 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는 이전 전두환, 노태우 정부 때도 추진했으나 반대 여론에 무릎을 꿇은,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정권 초의 자신감에 철저한 보안과 스피드가 아니었다면 시행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금융실명제는 이후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실명제의 여파로 1995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5000억 원 규모 비자금이 드러난다. 이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아 1995년 12월 검찰은 12·12쿠데타 및 5·18민주화운동, 비자금 사건 등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제왕처럼 여겨졌던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은 우리의 민주·민권의식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내 생각이다.
뜬금없이 YS 얘기가 길어진 것은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현 정부의 ‘지지부진’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를 맞아 ‘나라 망친 대통령’이라고 불렸지만, 적어도 YS 정권은 주요 정책을 추진할 때 ‘철통 보안 속에 속도감 있게 입안하고→한목소리로 터뜨려→힘 있게 시행’할 줄 알았다. ‘깜짝쇼’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세종시, 4대강 유역 개발, 종합편성채널 승인 문제 등 이 정부의 주요 정책 곳곳에서 지지부진, 중구난방이다. 현 정권이 집권 초 방송개혁에 실패한 것도 대선 때부터 ‘집권하면 방송을 손보겠다’는 식으로 떠들었기 때문이란 해석이 많다. 방송 기득권 세력의 공포감을 자극해 오히려 ‘결사항전’ 의지를 단단히 해줬다는 것이다.
다시 YS로 돌아가 보자. 그를 평가할 때 ‘군내 파워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해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군부 쿠데타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데는 이견이 별로 없다.
YS 정권 때의 주돈식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 따르면 “(YS가) 대통령 후보 시절 외국기자들이 ‘당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묻자 ‘두고 보자’고 짧게 대답했다”고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YS가 그때 “당선되면 손보겠다”고 속내를 드러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하나회가 YS 집권 초까지 넋 놓고 있다가 순순히 ‘무장해제’당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