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첫 ‘이토 히로부미 학술대회’ 기획 방광석 교수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연구하는 국제학술대회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린다. 이번 기회에 조선 침략의 핵심인물인 이토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 한일관계사 분석을 한 단계 더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위)와 그의 장례식 장면. 사진 제공 일본사학회·동아일보 자료 사진
100년 전인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국내에서 처음 열린다. 28일 숙명여대에서 일본사학회 주최로 열리는 ‘일본의 한국지배와 이토 히로부미’ 국제학술대회로 방광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48·사진)가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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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동안 권력 핵심에 앉아
‘문명화’ 구실로 조선침탈 야욕
日선 “근대화 아버지” 추앙
그러나 이토에 대한 국내 연구는 미진하다. 일본사나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 가운데 이토를 꾸준하게 연구하는 학자는 방 교수 외에는 찾기 힘들다. 방 교수는 “반일감정 때문에 국내에서 일본 역사를 연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1980년대로 불과 20여 년 전”이라며 “이 때문에 침략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에 대한 관심도 적었다”고 말했다. 방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의 국가 체제 구상’을 주제로 2004년 일본 릿쿄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최근 3년간 한일 학자들이 이토를 공동으로 연구한 게 기반이 됐다. 한일 학자들은 올해 7월 연구 결과를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라는 제목의 학술서에 담아 양국에서 동시 출간했다. 최근 이토에 대한 일본 학계의 평가와 관련해 방 교수는 “일본 학자들이 이토를 ‘한국에 문명 혜택을 제공한 인물’이라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방 교수가 이토를 연구하는 것은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1873년부터 1909년까지 36년간이나 총리와 추밀원 의장 등 권력의 핵심에 앉아 있었던 그를 연구하지 않고서는 일본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 침략의 배경과 정책 등을 정교하게 분석하는 일도 이토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방 교수는 “이토는 조선을 문명화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이는 철저하게 조선을 유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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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조선 식민지화 계획” “처음엔 간접통치 원해”▼
한-일 학자 상반된 인식
이토 전문가인 사카모토 교수는 발표논문 ‘이토 히로부미와 두 명의 군주’를 통해 “통감부 시기 내정의 통치 주체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한국 정부에 있었고 이토의 정치지도는 간접적인 것에 머물렀다”며 “이토는 처음에는 통감정치를 통한 간접통치를 원했으나 한국 정부를 존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결국 병합을 택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방 교수는 ‘메이지정부의 대외침략정책과 이토 히로부미’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이토는 현실주의적인 정치가로 통감이 되어 한국에 건너올 때부터 적당한 시기가 되면 직접 식민지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며 “처음에 ‘보호통치’ 방식을 택했다고 해서 이토가 병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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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학 일본사학회장(한림대 교수)은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한일 양국 학자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자극함으로써 자국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