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아픈 우리 남매 남들처럼 뛰어놀지 못해… 꿈 이룰 수 있을까요?”
《저는 광주 두암중학교 1학년 김태영입니다. 엄마와 중학교 3학년인 언니,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남동생이 있습니다. 저희 남매는 만성신부전으로 서울대 어린이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언니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복막투석을 하고 있고 저 역시 약을 먹고 있답니다.
우리 남매는 몸이 아파서 취미라곤 컴퓨터 하기, 텔레비전 보기가 전부였습니다. 저는 줄넘기를 좋아해 초등학교 때 상도 받았지만 지금은 전처럼 잘하지 못합니다. 남들처럼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기 어려운 저희는 그림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엄마는 “너희들 돌잔치 때 셋 다 연필을 잡았는데 그림 쪽에 소질을 보이려고 그랬나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저희 모두 장래희망이 만화가랍니다.
16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업실을 찾은 김태영 양(오른쪽) 승대 군 남매가 활짝 웃고 있다. 허 화백은 이들에게 “만화를 그리는 데 지름길은 없다”며 스케치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박영대 기자
“환경 딛고 ‘미래’ 만들어 가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독서량”
■ 만화가 허영만 화백 조언
16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만화가 허영만 화백 작업실. 만화가가 꿈인 김태영 양(13)이 허 화백과 마주 앉았다. 김 양은 4B연필을 쥐더니 A4용지에 쓱쓱 그림 한 장을 그려냈다.
“아무거나 그리라고 했더니 너를 그렸구나.” 허 화백의 얼굴에 잠깐 안쓰러운 빛이 돌다가 사라졌다. 김 양은 깡마른 단발머리 소녀를 그렸다.
또래보다 왜소한 김 양은 ‘알포트증후군’이라는 유전성 신장질환을 앓고 있다. 신장 기능이 서서히 약화돼 신부전증으로 진행되며 청력 약화 등의 증세를 동반한다. 근본적인 치료법은 없다. 김 양은 보청기를 써야 하지만 값이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그릴 때 망설인 것이거든. 자신 있게 쫙 그어야지. 이렇게.”
허 화백이 김 양의 손을 잡고 스케치하는 법을 가르쳤다. 김 양은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이 없다가 그림 속 소녀처럼 가끔 안경 너머의 눈이 반짝거렸다. 허 화백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중에 유명해지면 네가 오늘 그린 그림이 비싸질 테니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허영만 화백이 김태영 양과 동생 승대 군에게 선물한 캐리커처.
허 화백은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으면 지은이의 경험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며 “훌륭한 만화가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아이디어 구상하기, 취재하기, 스케치하기, 스크린 톤(만화에서 외곽선 안에 명암, 질감 등을 나타내기 위해 붙이는 스티커) 붙이기 등 만화 작업에 대해 설명했다.
옆에 있던 동생 김승대 군(11)이 신기한 듯 스크린 톤 붙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김 양처럼 만화가가 꿈인 김 군은 누나를 졸라 함께 왔다. 김 양의 언니와 김 군도 알포트증후군을 앓고 있다. 한부모 가정으로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있는 김 양의 집은 언니의 병이 악화되자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고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언니를 간호하고 있다.
“아저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대학을 못 가고 만화를 그리게 됐단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대학을 가지 못한 게 창피했어. 하지만 만화는 누구보다 잘 그리겠다고 마음먹고 불철주야 노력했지. 지금은 내 삶이 자랑스럽다. 미래는 너희들이 만들어 나가는 거야.”
허 화백은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남매의 캐리커처를 그려 선물했다. 남매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화실을 떠나는 남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 화백은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