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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도 다함께/열린 문화, 국경을 허문다]

입력 | 2009-04-22 02:57:00

16일 오전 서울 노원구의 한 산부인과에서 필리핀 출신의 비비안 아와스 씨(오른쪽)와 통역을 자원하고 나선 돈나벨 카시퐁 씨(가운데)가 의사의 진료 설명을 듣고 있다. 이들은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이 병원에 간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라며 “통역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영대 기자


주한 외국인의 힘겨운 병원 가기

시장통 말은 알아들어도…의사선생님 말은???

16일 오전 서울 노원구의 한 산부인과 대기실. 임신 6개월인 필리핀 출신의 비비안 아와스 씨(27·영어 강사)가 남편, 필리핀인 통역사와 함께 앉아 있었다. 아와스 씨가 초음파 촬영과 당뇨검사를 하는 날. 회사원인 남편 김혜웅 씨(32)는 아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하루씩 휴가를 내고 따라 나선다.

“집에 있으면 한국말을 곧잘 해요. 그런데도 병원에는 혼자 가지 않겠다고 해요.”

김 씨는 아내가 혼자 병원에 가고 외부활동도 해야 한국어를 빨리 배우고 한국문화에도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막상 혼자 보내려면 불안하다. 혹시 의사가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들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 너무 난해한 병원 대화

긴장된 표정의 아와스 씨가 남편의 말을 받았다. “병원에 혼자 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며 “친구가 혼자 병원 갔다가 말을 잘못 알아듣고 고생했다”고 친구의 경험담을 풀어 놓았다. 아와스 씨의 필리핀인 친구는 혼자 산부인과 병원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아이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기를 수개월. 막상 낳고 보니 건강하기만 했다. 의사의 말을 잘못 알아들고 괜히 마음고생 한 것이다.

옆에 있던 필리핀인 통역사 돈나벨 카시퐁 씨(37) 가 아와스 씨를 거들며 10여 년 전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했다. 첫아이 임신 4개월째, 병원에서 의사가 “(아이가) 자리에 없는데 앉아 있다”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무슨 말인지 뜻을 몰라 같이 있던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영어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남편의 영어는 서툴렀다. 남편은 그냥 “괜찮다”며 안아주기만 했다. 카시퐁 씨는 병원 문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아이가 유산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병원 통역서비스 시급

카시퐁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고 게다가 병원에 자주 가지 않아 아이가 유산됐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첫아이 임신 때 필리핀 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어요. 근데 한국에는 필리핀 음식이 없었어요. 고향에 있으면 음식도 마음껏 먹고 친구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좋았겠죠.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아요.”

카시퐁 씨에게는 지금 아홉 살, 일곱 살짜리 두 아들이 있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 다행이지만 첫아이 유산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카시퐁 씨는 유난히 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 그래서인지 “병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꼭 동향 사람인 통역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눌한 말솜씨로 병원에서 의료진에게 말을 걸었다가 그들이 ‘뭐라고요?’라고 거센 반응을 보이면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외국 사람입니다. 몸이 아플 땐 더욱 고향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워지는데….”

어려움과 외로움을 겪어본 그는 현재 서울 동대문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필리핀어 통역사로 일한다. 학교 상담이나 행정·사법기관, 병원 진료 등에 통역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카시퐁 씨가 아와스 씨를 만난 것도 이곳을 통해서였다. 카시퐁 씨는 “영어를 할 줄 아는 필리핀인은 좀 나은 편인데 영어도 한국어도 어눌한 이민자들은 병의원을 이용할 때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며 통역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 문화적 차이도 진료의 애로사항

이민자를 진료하는 의료진에게도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설명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주 외국인 중 일부는 의료진의 지시를 잘 듣지 않는다. 고려대 안산병원 사회사업팀 송지원 팀장은 “의사가 하는 이야기보다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려는 사람이 더 많다”고 전했다.

올해 2월 이 병원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다문화 가정의 자녀 민수(가명)의 경우가 그랬다. 민수는 미숙아인 데다 선천적인 심장병이 있어 태어난 뒤 곧바로 수술을 해야 했다. 면역에 약해 사소한 감염도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의료진은 필리핀 출신 어머니에게 “매번 젖병을 소독해야 하고 옷도 자주 갈아입혀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필리핀에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란다”며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문화적 차이였다. 송 팀장은 “치료를 할 때도 문화적 차이가 장벽이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며 “이민자들에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상세히 설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