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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하니까… 예산 준다니… 대학 입학사정관제 ‘위험한 경쟁’

입력 | 2009-03-13 02:58:00


준비안된 대학 “발표하고 보자” 사정관 한명이 수백명 심사할 판

무책임한 정부 “못하는 곳은 지원 없다”… 대학들 무리수 부추겨

패닉상태 고3 “내신 포기도 못하고… 시험 코앞인데 준비 막막”

서울 상문고 3학년 학생회장인 이주섭 군은 학생회 활동이 입학사정관 전형에 플러스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학교 내신 공부를 안 할 수도 없다.

KAIST 서남표 총장의 발표로 불이 붙은 입학사정관 확대 경쟁에 주요 대학들도 마치 ‘유행 따라잡기’처럼 뛰어들면서 수험생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 ‘미대=실기’라는 등식을 깨고 아예 실기시험도 없애겠다는 홍익대의 ‘입시 쿠데타’까지 이어지자 학교 입시 현장은 거의 패닉(공황) 상태다.

이러다간 점수 1, 2점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성과 잠재력을 보겠다는 입학사정관제의 원래 취지까지 잠식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준비 안 된 대학과 교육 당국의 무책임한 행태에 대한 비난이 높을 수밖에 없다.

▽준비 안 된 대학=각 대학이 입학사정관제 선발 인원을 경쟁적으로 늘리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제도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각 대학의 준비 현황과 선발 인원을 비교해보면 박수만 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 소재 사립대학들은 올해 300∼1000명의 학생을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하겠다고 잇달아 발표했다. 고려대 서강대 숙명여대는 정원의 20% 이상을 뽑겠다고 한다.

모 대학은 발표 전날 경쟁대학을 의식해 부랴부랴 입학사정관제 선발 인원을 100명 이상 늘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통계에 따르면 이들 대학 가운데 입학사정관 수가 10명을 넘는 곳이 거의 없다. 2008년을 기준으로 건국대 경희대 서울대 정도다.

상위권 대학에는 선발 인원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지원하는 점을 감안하면 입학사정관 한 명이 수백 명을 심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김문식 서울고 교사는 “작년에 대학들이 입학사정관제로 뽑은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겨우 수상 실적이나 자격증을 검토하는 수준이었다”면서 “지원자 수천 명을 심층 면접하고 학교나 가정을 방문하는 ‘진짜 입학사정관제’는 꿈같은 얘기”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입학사정관을 채용한 지 2, 3년 정도인 대학이 대부분이다. 국내에 입학사정관 전문가라고 할 만한 인력 풀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해당 교육을 받거나 훈련을 제대로 거친 경우도 드물다.

90년 가까이 입학사정관 제도를 운용해 온 미국은 전미입학사정관협회(NACAC)가 온·오프라인을 통해 교육을 실시한다. 개별 대학은 분기마다 자체 교육을 실시하고, 자체 교육이 없는 대학은 입학사정관을 경력자 위주로 선발해 현장의 노하우를 전수하도록 한다.

1990년대에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일본은 게이오대에서 시작된 ‘AO 입시’를 현재 70% 정도의 대학이 도입했다. 우리보다 훨씬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지만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형평성 시비도 여전하다. 결국 한국의 수능과 비슷한 ‘센터시험’과 내신 점수 반영률을 높이고, 입학 후에 선행학습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욕심 앞선 교육당국=대학이 무리수를 두도록 기름을 부은 것은 교육 당국이다.

입학사정관 인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어떤 요소를 볼 것인지 고민할 틈도 없이 교육 당국이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입학사정관제 확대에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교과부가 입학사정관제 지원 예산을 차등적으로 주기로 한 것이 단초가 됐다.

40개 대학에 236억 원을 지원하되 잘하는 대학은 예산을 많이 주고, 못하는 대학은 빼버리겠다고 했다.

‘잘하는 대학’을 평가하는 지표에는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의지, 즉 선발 인원이 들어 있다. 대학마다 많은 돈을 따내자니 당장 선발 인원을 늘릴 수밖에 없는 꼴이다.

한 대학 입학 담당자는 “이제 입학사정관제의 씨를 뿌리는 참인데 교과부는 줄기를 당기고 열매를 따려 한다”면서 “입학사정관제의 정책성과는 학생을 많이 뽑는 것이 아니라 소수라도 제도의 취지에 맞는 학생을 뽑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김기용 기자 k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