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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1-19 02:58:00


반복은 아름답다.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반복을 통해 극한에 이른 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패배를 견딘다.

로봇MC 남이 개국 축하쇼를 시작하던 바로 그 시각, SAIST(Seoul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격투로봇 훈련장 겹문이 쿠쿵 쿠쿠쿵 메아리를 토하며 닫혔다.

완벽한 어둠이어야 했다. 100나노미터의 틈만 있어도 정찰과 비밀 촬영용 스파이 곤충 로봇 더스트 버터플라이(Dust Butterfly)가 숨어든다. 낮말도 로봇이 듣고 밤말도 로봇이 듣는다.

천장에서 일곱 가닥 독빛살(Poison Light)이 쏟아졌다.

훈련장이 부분부분 밝아졌다가 순간순간 어둠으로 돌아갔다. 곤충 로봇의 오작동을 유발하는 독빛살이 멸균하듯 지나간 자리엔 을씨년스러움이 더했다.

독빛살이 중앙으로 뭉쳐 격투로봇 글라슈트를 감쌌다. 로봇의 눈매가 유난히 매서웠다.

1미터95센티미터, 320킬로그램.

글라슈트는 파워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격투 로봇보다 키도 작고 몸도 호리호리했다. 미끈하게 빠진 외장은 초강력 티타늄 마그네슘 합금으로 만들었고, 팔다리와 목 관절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알파 모터와 베타 모터를 263개나 달았다. 눈과 무릎, 뒷목에 부착된 넉 대의 카메라는 0.001초마다 움직이는 물체를 파악하여 실시간으로 대응 동작을 조절했다. 발달된 하체는 5G의 압력에도 쓰러지지 않고 너끈히 버틸 만큼 안정감이 있었다.

글라슈트가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양발을 번갈아 내디뎠다가 거두는 품이 춤을 추듯 흥겹고 부드러웠다. 글라슈트는 격투 로봇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움츠리고 움츠리고 또 움츠렸다가 단번에 끝내는 것이 글라슈트만의 격투법이다. 2048년 스물아홉 차례 경기 결과와 격투로봇 비평가협회의 평점 그리고 300개 특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인기도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배틀원(Battle-One) 2049’ 참가자격을 얻었다.

2040년부터 대리전(代理戰) 성격의 국제경기는 전면 금지되었다. 국가 단위 체육경기인 올림픽과 월드컵은 클럽이나 개인 단위 경기로 바뀌었다. 국가와 민족 혹은 인종끼리 스포츠를 통해 벌이던 상징적이고 잠재적인 전쟁의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배틀원에 초청받은 로봇 역시 각 특별시 대표가 아니다.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로봇이 많았고 특정 지역의 이미지가 강조되어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별시 몇 군데의 연구진이 컨소시엄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단일 특별시의 연구진도 출생지와 인종과 언어가 제각각이었다.

토너먼트 첫 경기는 두 달 뒤였고, 그 사이 격투 로봇 ‘무사시’와의 평가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사무라이 로봇은 악명이 높았다. 상대 로봇을 영원히 고물로 만든 경기가 무려 다섯 차례였다. 베를린 로봇연구소와 리우데자네이루 로봇아트센터 멤버로 짜인 무사시 팀은 인터뷰를 할 때마다 큰소리를 쳤다. 글라슈트를 여섯 번째 희생양으로 삼겠다고. 따라서 배틀원 2049 초청 로봇은 한 대가 줄 것이라고.

훈련장을 구석구석 훑던 독빛살이 사라지자 비로소 전체 조명이 들어왔다.

최볼테르는 팔각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작은 키에 헝클어진 머리와 구부정한 어깨 그리고 실핏줄이 비칠 만큼 희고 창백한 피부는 산만한 예술가 분위기를 풍겼다. 금테 안경 속 눈동자만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아버지 최성한과 어머니 소피는 35년째 파리특별시 천문연구센터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다. 볼테르는 영재초 과학중 과학고 SAIST의 엘리트 코스를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23세에 SAIST 로봇대학 엔터테인먼트로봇학과 교수 겸 ‘RINGE(Robotics Institute for Next Generation)’ 최연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휴우!”

무사시의 자료 영상을 살피던 볼테르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시의 양손이 순식간에 쌍칼로 바뀌더니 상대 로봇의 옆구리를 찍어 들어 올린 것이다. 배틀원 2048 준우승 로봇다운 공격력이었다.

“시작할까요?”

트레이너 서사라가 오른 발을 쓰윽 머리 위까지 치켜 올려 멈춘 후 물었다.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만 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맸다, 한 마리 흑표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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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은 지면 게재일 전날 오후 2시부터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