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 한 달째인 7일, 충남 태안군 만리포 앞바다에는 뿌연 연무와 함께 거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자원봉사자들이 TV에서 본 것처럼 많지는 않았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걸스카우트 소녀들이 서로의 흰색 방제복이 신기한 듯 디카로 사진을 찍어대며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여길 왔느냐”는 질문에 기대했던 대답 대신 “요즘 태안에 안 다녀오면 친구랑 대화에 못 끼어요”라는 솔직한 답이 돌아왔다.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기분으로 왔든, 숭고한 사명감을 갖고 왔든 태안은 여전히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니까.
겉으로 보기에 모래사장은 깨끗했고 바닷물도 맑았다. 하지만 삽으로 백사장을 30cm만 파도 말간 기름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한편에선 모래 속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이른바 ‘밭 갈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포클레인이 모래를 뒤집으면 뒤집힌 모래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는 것이다.
태안이 한 달 만에 이런 정도의 모습이라도 찾을 수 있었던 데엔 ‘기적’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면 그 충격과 여파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참 운 좋은 나라라는 역설을 확인하게 된다. 그 첫째 이유는 사고 시점이 다행스럽게도 겨울이었다는 점이다.
겨울철 한반도에는 북서풍이 분다. 그 덕에 기름은 사방팔방으로 번져나가지 않고 태안 해변에 집중적으로 들러붙었다. 태안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만 이로 인해 다른 지역의 오염 피해가 크게 줄었다. 일부 타르볼이 해류를 따라 남하해 추자도까지 흘러가긴 했지만 전북 등지의 2차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만일 사고가 여름철이나 태풍 발생기에 일어났다면 서해 전역이 검은 기름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둘째, 따뜻한 겨울에 감사할 일이다. 같은 겨울이라도 추운 날씨에 사고가 났다면 기름은 강풍을 타고 더 많이 더 멀리 흘러갔을 것이고, 해변을 덮친 기름도 얼어붙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기름은 휘발성이 강한 물질인데, 높은 기온 덕에 상당량이 자연스럽게 휘발했다고 한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방제작업이 수월했다는 것도 행운이다.
셋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자원봉사자의 역량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사고 후 한 달 동안 사고현장을 찾은 자원봉사자는 80만 명을 넘었다. 지역주민과 공무원은 물론이고 “내 손으로 자갈 하나라도 닦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에서 몰려든 순수 자원봉사자만 50만 명이다. 태안 어딜 가든 이들이 연출한 ‘기적’을 보고 들을 수 있다. 단기간에 이만큼 기름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도 자원봉사자 덕이지만 좌절과 시름에 빠진 주민에게 ‘당신들은 외롭지 않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태안이 대신 짊어진 재앙
이런 전무후무한 환경 재앙의 수습 과정에서 눈살 찌푸려지는 일도 없지 않다. 사고 책임 규명 작업이 아직도 진행 중이고 피해 보상 범위를 둘러싼 불협화음도 들린다. 그중 가장 아쉬운 점은 13년 전 전남 여수시 시프린스호 기름 유출 사고의 교훈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경의 오염 방제 능력은 기상 악화 상황에서 맥을 추지 못했고 현장에선 올바른 오염 제거 방식을 몰라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긴급 방제가 일단락되면서 자원봉사자의 관심이 줄어들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생태계가 회복되는 데는 기나긴 세월이 필요하다. 지난해 진태구 태안군수가 “내년에는 해수욕장을 개장하겠다”고 말한 것은 자연을 가볍게 본 발언 같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해수욕장이 아니다. 상처 입은 태안이 아물어가는 과정을 함께하고픈 것이다. 태안은 긴 회복의 여정, 그 출발점에 겨우 섰을 뿐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