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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궁핍한 골목길에 햇볕이…

입력 | 2008-01-01 02:58:00

‘어깨동무 내 동무’ 그림=남성훈, 문학동네


그곳에 가면, 마르지 않는 추억의 샘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들의 등 뒤에 숨어 있지만 뒤돌아 볼 때마다 큰 위안을 얻는 그곳은 바로 골목길입니다. 고샅길이라고도 부르는 그 길 막다른 곳에 양철로 지붕을 올린 가난한 우리들의 집이 있었습니다.

소낙비가 퍼붓는 여름날은 좁은 툇마루에 배를 깔고 엎드려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빗줄기가 황토와 함께 다시 튀어 올라 콧등을 때리던 그 낮은 집이 골목 안에 있었습니다. 붉게 녹슨 양철지붕 위로 요란하게 떨어지는 빗소리의 음률에 맞춰 발장구를 치면서 비 오는 날의 무료함을 달랬던 그곳의 흔적이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추녀마다 전선줄과 전깃줄이 실타래처럼 엉켜 누전으로 곧잘 스파크가 일어났지요. 그것을 불꽃놀이로 착각해 손뼉 치며 좋아하다가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구슬치기, 비사치기, 딱지치기, 땅따먹기, 술래잡기, 말타기, 돌담 아래 민들레 뜯어 소꿉질하기로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던 그곳이 이젠 철거라고 휘갈겨 쓴 붉은 페인트 글씨가 무희처럼 춤추고 있습니다. 그 길 아래로 지하철이라는 잠망경도 없는 잠수함이 지나다니면서 지진처럼 하루 종일 땅을 뒤흔들어댑니다. 그래서 사라지는 골목길과 함께 추억도 멀리로 달아납니다.

가난의 휠 대로 휜 삶의 땟국이 켜켜이 묻어났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가난의 실체를 경험할 수 없었다고 대답할 수 있는 고결한 삶이 있었습니다. 담벼락에 묻어 있는 아침 햇살을 즐기려고 헐벗은 아이들이 미어캣처럼 시린 똥배를 내놓고 해바라기하던 곳. 이웃끼리 서로 모여 지지고 볶고, 욕하고 말타기하고 무동 태우며, 때로는 드잡이하고 삿대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곳이 바로 골목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체적 접촉이 사라질 때, 이웃과의 진정한 소외는 완성된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조그만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접촉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기대와 소망으로 쉽게 좌절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듯하지만, 마음속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아 삶의 본질과 숙연하게 맞부딪쳐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래서 유장한 순환의 힘이 천연덕스럽게 놓여 있는 곳.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깊어 담벼락마다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곳, 가짜를 싣고 다니며 진짜처럼 호객 하는 과일 장수가 하루 종일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그 궁핍한 골목길에 속옷을 입지 않아도 뱃속까지 뜨거워지는 빗살 촘촘한 햇살이 무더기로 비쳤으면 좋겠습니다.